테트라그라마톤 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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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일장 일절에 나오는 단어 중 엘로힘(알렙 라멭 헤 요드 멤)이란 단어가 있다
히브리어 명사는 주로 동사에서 명사로 파생되어 오는 길을 걸었다 원칙적으론 알파벹
석자로 한 단어를 이루지만 때에 따라 접두어가 붙기도 하고 겹겹 접두어도 붙는
일이 종종 있으며 접미어가 붙어 알파벹의 수효가 늘어난다 그래서 우리말 음역으로
"엘로힘"도 다섯 알파벹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며 단수명사가 아니라 복수 명사다
하지만 복수명사는 일반적으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으로 장엄한복수라고
해서 단수로 쓰이는 단어다 물론 엘로힘은 신들 재판관들 천사들 로 사용된 단어로
권능을 말하는 주권적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주로 "엘로힘"을 사용하고 위격 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름으론 "여호와"로 사용되고 있다. 창세기엔 2장 4절부터 "여호와"란 이름이
등장한다. 출애굽기에 이르러 6장 3절에는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구절을 맺었다.
본 절에선 두 단어를 볼 것이다 "나의 이름"과 "여호와"라는 단어를 살펴볼 예정이다
여기서 "나의 이름"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우쉐미"로 기본 어는 "셤"으로 와우 접속사가
접두 된 남성단수명사로 주어 "엘로힘"을 말하는 것으로 "엘로힘"의 이름이 "여호와"란
사실을 그들,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아야 하는 그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에게
왜 알리지 않았을까 ? 나 산화비의 개인적 의견은 100 % 배제하고 정통기독교 주해만
올린다 그러니 가짜목사나 적그리스도 이쑤스가 알아들을 수나 있을까?
먼저 이름을 설명하고 여호와를 설명하고 알다라는 단어를 살피는 방향으로 글을 이어 간다
먼저 "이름"이란 말은 정경 내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나 지칭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의존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속성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을 알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다룰 "노다티 알다“ 란 의미의 단어가 수동의 의미만이 아니라 단순
재귀 형으로만 쓰인 것도 아닌 재귀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좀 약간 난해하리라 하지만
끝에 가서는 문제없이 이해하게 되리라
일단 이름이란 건 살펴보았고 다음은 본 절의 가장 중심이 되는 "여호와"를 알아보자
"여호와"는 "엘로힘"하나님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미 피조물들은 "여호와"란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그들은 "여호와"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창15:7
22:14 절을 찾아보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란 이름 속에
담긴 하나님의 속성이 직접적으로 삶을 통해 그들 위의 세 분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때 다시 "여호와"로 돌아가서 "여호와"를 살피자 "여호와"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
운다 신성사문자란 의미다 우리들 눈으론 "헤 와우 헤 요드"로 보이지만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가야 하기 때문에 발음은 "요드 헤 와우 헤"로 발음해야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단어는 모음이 없는 자음 사문자라서 피조물 인간은 발음을 할 수 없다
또한 신성한 이름이라 하여 유대인들은 절대 입에도 올리지 않았고 심지어 정경 필사 자들도
일단 테트라그라마톤을 만나면 공간만 남겨 두고 건너뛰고는 후에 목욕재계하고 붓을
빨아서 다시 자리를 고쳐 앉아 테트라그라마톤만 따로 기록을 할 정도 였으니 발음은
더더군다나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테트라그라마톤을 만나면 "아도나이"로
읽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아돈"에서 파생된 단어로 헬라어로는 κυριου 로 쓰인 단어다
우리말로는 "주"라고 번역이 되는 단어로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주 κυριου"로 읽어 왔다
물론 적그리스도 이쑤스는 “아도나이”가 헬라어라고 우기는 중 이다 이미 경험이 있다
물론 6~7 세기에 마소라 본문이 확립되었을 때 도입된 모음독법과 결합에 의해 생긴 인위적
인 형태로 간주되기도 하고 일설엔 1520년경 "페트루스 가라티누스"에 의해 기원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테트라그라마톤 "요드 헤 와우 헤" 에다 아도나이란 히브리 단어의 모음부호를
"알렙 달렛 눈 요드"의 모음부호를 한자 한자 이적을 하였다 설명을 하면 먼저 아도나이고
다음이 "여호와"로 넘어 간다 아도나이의 첫 자 알랩의 모음부호는 글자 밑에 점을 찍듯 있다
그래서 테트라그라마톤 첫 자 요드에 밑에 점을 찍었다 두 번째 글자는 글자 위의 왼쪽 어깨에
점을 찍는 것인데 이 모음부호도 똑같이 옮겼다 세 번째 글자의 모음부호는 글자 밑에
한자어 三 자처럼 붙었는데 이 역시 그대로 옮겼다 마지막 넷째 자는 모음부호가 없다
이렇게 아도나이의 모음부호를 테트라그라마톤에 그대로 옮기면 그 발음이 "예흐바"가 된다
우리말로는 "여호와"로 우리말 음역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중세 때부터 인간의 약속이지 정경의 발음은 아무도 모른다 아직도 하나님이
인간이 아는 걸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리라 인간들끼리의 편의상 "여호와"로 부르는 걸
상기하자
출애굽기 6장 3절에는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는
구절에서 "나의 이름"과 "여호와"에 관한 주해는 위에 이미 끝을 맺었고 지금은 하나
남은 "여호와로는 알리지 아니 하였고"를 설명하려 한다 원어는 "예흐와 로 노다티"란
문구로 "예흐와"는 우리말 "여호와"로 번역이 된 단어고 "로"라는 단어는 부정불변사로
우리말로는 "아니하였고"로 번역이 된 단어다 이제는 하나 남은 단어 "알리지"란 의미의
원어 "노다티"를 설명하려 한다 이 단어는 위에 이미 재귀 형이라고 귀 띰을 한 단어로
지금은 조금 깊게 생각해 보자
"노다티"는 "알다"(창3:15 29:5)라는 뜻의 "야다"의 단순 재귀 형으로 수동의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KJV는 이러한 수동의 의미를 살려 "노다티"를 "알려지다"로 번역을 하여 본문을
"그러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내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but by my name JEHOVAH
was I not known to them) 으로 해석을 하였다 원문은 "로 노다티"란 단 두 단어인데
왜 이렇게 KJV는 여러 개의 단어를 동원하여 해석을 하였을까는 의심의 소지가 아주 많다
하지만 단순 재귀 형은 수동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재귀의 의미를 갖기도 하기
때문에 "노다티"는 자기 자신을 알게 하다(make oneself known) 로 번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NASB는 이러한 재귀의 용법으로 해석하여 "그러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내가 그들에게 내 자신을 알리지 않았다 로 번역을 한다 물론 우리글 번역 성경은 "노다티"를
사역형의 의미로 해석하여 "~을 ~에게 알리다"란 의미로 번역을 하였다 하지만 "야다"의
사역형은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번역은 문법적으로 정확한 번역이라 보기 어렵다
테
히브리어 명사는 주로 동사에서 명사로 파생되어 오는 길을 걸었다 원칙적으론 알파벹
석자로 한 단어를 이루지만 때에 따라 접두어가 붙기도 하고 겹겹 접두어도 붙는
일이 종종 있으며 접미어가 붙어 알파벹의 수효가 늘어난다 그래서 우리말 음역으로
"엘로힘"도 다섯 알파벹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며 단수명사가 아니라 복수 명사다
하지만 복수명사는 일반적으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으로 장엄한복수라고
해서 단수로 쓰이는 단어다 물론 엘로힘은 신들 재판관들 천사들 로 사용된 단어로
권능을 말하는 주권적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주로 "엘로힘"을 사용하고 위격 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름으론 "여호와"로 사용되고 있다. 창세기엔 2장 4절부터 "여호와"란 이름이
등장한다. 출애굽기에 이르러 6장 3절에는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구절을 맺었다.
본 절에선 두 단어를 볼 것이다 "나의 이름"과 "여호와"라는 단어를 살펴볼 예정이다
여기서 "나의 이름"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우쉐미"로 기본 어는 "셤"으로 와우 접속사가
접두 된 남성단수명사로 주어 "엘로힘"을 말하는 것으로 "엘로힘"의 이름이 "여호와"란
사실을 그들,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아야 하는 그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에게
왜 알리지 않았을까 ? 나 산화비의 개인적 의견은 100 % 배제하고 정통기독교 주해만
올린다 그러니 가짜목사나 적그리스도 이쑤스가 알아들을 수나 있을까?
먼저 이름을 설명하고 여호와를 설명하고 알다라는 단어를 살피는 방향으로 글을 이어 간다
먼저 "이름"이란 말은 정경 내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나 지칭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의존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속성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을 알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다룰 "노다티 알다“ 란 의미의 단어가 수동의 의미만이 아니라 단순
재귀 형으로만 쓰인 것도 아닌 재귀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좀 약간 난해하리라 하지만
끝에 가서는 문제없이 이해하게 되리라
일단 이름이란 건 살펴보았고 다음은 본 절의 가장 중심이 되는 "여호와"를 알아보자
"여호와"는 "엘로힘"하나님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미 피조물들은 "여호와"란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그들은 "여호와"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창15:7
22:14 절을 찾아보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란 이름 속에
담긴 하나님의 속성이 직접적으로 삶을 통해 그들 위의 세 분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때 다시 "여호와"로 돌아가서 "여호와"를 살피자 "여호와"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
운다 신성사문자란 의미다 우리들 눈으론 "헤 와우 헤 요드"로 보이지만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가야 하기 때문에 발음은 "요드 헤 와우 헤"로 발음해야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단어는 모음이 없는 자음 사문자라서 피조물 인간은 발음을 할 수 없다
또한 신성한 이름이라 하여 유대인들은 절대 입에도 올리지 않았고 심지어 정경 필사 자들도
일단 테트라그라마톤을 만나면 공간만 남겨 두고 건너뛰고는 후에 목욕재계하고 붓을
빨아서 다시 자리를 고쳐 앉아 테트라그라마톤만 따로 기록을 할 정도 였으니 발음은
더더군다나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테트라그라마톤을 만나면 "아도나이"로
읽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아돈"에서 파생된 단어로 헬라어로는 κυριου 로 쓰인 단어다
우리말로는 "주"라고 번역이 되는 단어로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주 κυριου"로 읽어 왔다
물론 적그리스도 이쑤스는 “아도나이”가 헬라어라고 우기는 중 이다 이미 경험이 있다
물론 6~7 세기에 마소라 본문이 확립되었을 때 도입된 모음독법과 결합에 의해 생긴 인위적
인 형태로 간주되기도 하고 일설엔 1520년경 "페트루스 가라티누스"에 의해 기원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테트라그라마톤 "요드 헤 와우 헤" 에다 아도나이란 히브리 단어의 모음부호를
"알렙 달렛 눈 요드"의 모음부호를 한자 한자 이적을 하였다 설명을 하면 먼저 아도나이고
다음이 "여호와"로 넘어 간다 아도나이의 첫 자 알랩의 모음부호는 글자 밑에 점을 찍듯 있다
그래서 테트라그라마톤 첫 자 요드에 밑에 점을 찍었다 두 번째 글자는 글자 위의 왼쪽 어깨에
점을 찍는 것인데 이 모음부호도 똑같이 옮겼다 세 번째 글자의 모음부호는 글자 밑에
한자어 三 자처럼 붙었는데 이 역시 그대로 옮겼다 마지막 넷째 자는 모음부호가 없다
이렇게 아도나이의 모음부호를 테트라그라마톤에 그대로 옮기면 그 발음이 "예흐바"가 된다
우리말로는 "여호와"로 우리말 음역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중세 때부터 인간의 약속이지 정경의 발음은 아무도 모른다 아직도 하나님이
인간이 아는 걸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리라 인간들끼리의 편의상 "여호와"로 부르는 걸
상기하자
출애굽기 6장 3절에는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는
구절에서 "나의 이름"과 "여호와"에 관한 주해는 위에 이미 끝을 맺었고 지금은 하나
남은 "여호와로는 알리지 아니 하였고"를 설명하려 한다 원어는 "예흐와 로 노다티"란
문구로 "예흐와"는 우리말 "여호와"로 번역이 된 단어고 "로"라는 단어는 부정불변사로
우리말로는 "아니하였고"로 번역이 된 단어다 이제는 하나 남은 단어 "알리지"란 의미의
원어 "노다티"를 설명하려 한다 이 단어는 위에 이미 재귀 형이라고 귀 띰을 한 단어로
지금은 조금 깊게 생각해 보자
"노다티"는 "알다"(창3:15 29:5)라는 뜻의 "야다"의 단순 재귀 형으로 수동의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KJV는 이러한 수동의 의미를 살려 "노다티"를 "알려지다"로 번역을 하여 본문을
"그러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내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but by my name JEHOVAH
was I not known to them) 으로 해석을 하였다 원문은 "로 노다티"란 단 두 단어인데
왜 이렇게 KJV는 여러 개의 단어를 동원하여 해석을 하였을까는 의심의 소지가 아주 많다
하지만 단순 재귀 형은 수동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재귀의 의미를 갖기도 하기
때문에 "노다티"는 자기 자신을 알게 하다(make oneself known) 로 번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NASB는 이러한 재귀의 용법으로 해석하여 "그러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내가 그들에게 내 자신을 알리지 않았다 로 번역을 한다 물론 우리글 번역 성경은 "노다티"를
사역형의 의미로 해석하여 "~을 ~에게 알리다"란 의미로 번역을 하였다 하지만 "야다"의
사역형은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번역은 문법적으로 정확한 번역이라 보기 어렵다
테
추천 0
작성일2020-03-30 05:44
이대로님의 댓글
이대로
창세기 4장 1 [개역개정]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이대로님의 댓글
이대로
창18: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대로님의 댓글
이대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문자적으로 “그분은 되게 하시다”, 즉 하나님의 목적대로 “되게 하시다”를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여호와로부터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약속들이 완전히 성취되게 하시는 분으로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즉===== 체험하지 못했다. (창세 12:1, 2; 15:7, 13-16; 26:24; 28:10-15) ===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은 그들의 후손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되어 있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의 성취로
그들을 학대에서 구원하신 다음 약속의 땅을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목적을 이행하실 때,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의미=되게 하신다>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약속들이 완전히 성취되게 하시는 분으로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즉===== 체험하지 못했다. (창세 12:1, 2; 15:7, 13-16; 26:24; 28:10-15) ===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은 그들의 후손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되어 있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의 성취로
그들을 학대에서 구원하신 다음 약속의 땅을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목적을 이행하실 때,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의미=되게 하신다>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