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요세푸스까지 써먹는 거냐? 차라리 도올의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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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자료는 4복음서가 거의 유일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보다 약간 후대의 사람이지만, 예수와 동시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c.100)의 『유대인 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예수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언급이 참으로 역사적 예수의 진면목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신약성서 밖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요세푸스는 예수가 처형당한 직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10대의 청년 시기에는
엣세네파에 속하여 사막에서 고행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 바리새파의 일원으로 자신을 분류할 만큼
율법주의에 철저한 훈련을 받은 고등한 태생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요세푸스는 물론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역사를 썼다. 그러나 그는 떳떳지 못한
변절자의 입장에서 로마인들을 위해 유대의 역사를 집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겪은 생생한 역사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사가에게 과도한 이념성을 강요
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을 비방하는 세력에 맞서 유대인의 영웅적 행동을 충분히 옹호할 수 있었다.
하여튼 그의 역사기록은 우리가 성서를 이해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보충자료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수에 관한 기록은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절에 벌어진 사건들을 기술하는 도중에서
매우 퉁명스럽게 한 독립된 단락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때에,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현자(a wise man)라고 말해야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고,
수많은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다.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고소 때문에
이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족속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유대인 고대사』, Bk.16, Ch.3, 63~64)
우리가 성경 밖에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러한 당대의 증언을 확보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문헌의 신빙성에는 많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선 편집적으로 볼 때, 예수에 관한 단락을
빼놓고 보면 『유대인 고대사』의 문장은 더 부드럽게 연결된다. 사건들의 시간상 흐름이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저술들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편집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보존되고 필사되었다.
요세푸스의 이 증언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4세기 초에 그 유명한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를
쓴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c.260~c.339)였다. 유세비우스는 예수시대의 정치적 사건들을
언급한 복음서에 대한 독립적 증거로서 요세푸스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데, 인용할 때마다 다르게 인용한다.
다시 말해서 요세푸스의 텍스트가 고정적이질 않았다는 증거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요세푸스의
『유대인 고대사』의 예수 단락 자체가 유세비우스 자신의 날조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이라는 표현은 매우 인위적이다. 한 인간으로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 대단하다는 긴장감을 삽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사람은 그리스도였다”라는 표현도 해괴하다.
요세푸스는 유대사를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들을 위하여 쓴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표현은 매우 어색하다. 유대인을 빼놓고는 아무도 알아들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의 로마인들에게는
그냥 “그는 기름을 뒤집어쓴 자였다”라는 이상한 말로 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족속”이라는 표현도 특이하다. ‘족속(phyl)’이라는 표현은 객관화될 수 있는 한 국적의 인종을 말한다. 후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제3의 인종’으로 규정하여 말하는 용례가 있기는
하지만 요세푸스 시대에는 그토록 그리스도인들이 별개의 인종적 그룹으로서 특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여튼 이 요세푸스의 기록은 유대인의 기술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기독교적이고, 공평한 사가의 기술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신앙고백적이며, 진실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복음서의 기술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기록을 반드시 후대 기독교인들의 날조라고 볼 수만은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첫째, 필사자들이 약간의 변경을 했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전체를 날조했다고 주장할 만한 확실한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 날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토록 시시하게 조금만 서술했을 리가 없다.
세례 요한에 관한 기록에 비해 너무 초라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문체나 어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나는 이 요세푸스의 증언기록이 완벽하게 날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부분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단정한다.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이 사람은 그리스도였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라는 구절을 삭제해 버리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매우 재미있는 정보들을 얻게 된다.
예수는 현인(賢人)이었으며,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으며,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진리의 스승이었다. 여기에는 이적이나 부활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지체 높은 지도자들에 의해 고소되었고, 빌라도 자신의 판단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형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요세푸스 시대에까지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세푸스의 사가로서의 기술은 우리에게 별다른 새로운 정보를 전하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는 풍요로운 복음서의 기술 속에서 역사적 예수를 발굴하는 작업으로 진입해야 한다.
그 작업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처형된 AD 30년과 마가복음이 집필된 AD 70년 사이 40년간의 역사에 관한
매우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 바로
도마복음서의 발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보다 약간 후대의 사람이지만, 예수와 동시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c.100)의 『유대인 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예수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언급이 참으로 역사적 예수의 진면목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신약성서 밖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요세푸스는 예수가 처형당한 직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10대의 청년 시기에는
엣세네파에 속하여 사막에서 고행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 바리새파의 일원으로 자신을 분류할 만큼
율법주의에 철저한 훈련을 받은 고등한 태생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요세푸스는 물론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역사를 썼다. 그러나 그는 떳떳지 못한
변절자의 입장에서 로마인들을 위해 유대의 역사를 집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겪은 생생한 역사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사가에게 과도한 이념성을 강요
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을 비방하는 세력에 맞서 유대인의 영웅적 행동을 충분히 옹호할 수 있었다.
하여튼 그의 역사기록은 우리가 성서를 이해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보충자료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수에 관한 기록은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절에 벌어진 사건들을 기술하는 도중에서
매우 퉁명스럽게 한 독립된 단락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때에,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현자(a wise man)라고 말해야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고,
수많은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다.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고소 때문에
이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족속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유대인 고대사』, Bk.16, Ch.3, 63~64)
우리가 성경 밖에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러한 당대의 증언을 확보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문헌의 신빙성에는 많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선 편집적으로 볼 때, 예수에 관한 단락을
빼놓고 보면 『유대인 고대사』의 문장은 더 부드럽게 연결된다. 사건들의 시간상 흐름이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저술들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편집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보존되고 필사되었다.
요세푸스의 이 증언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4세기 초에 그 유명한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를
쓴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c.260~c.339)였다. 유세비우스는 예수시대의 정치적 사건들을
언급한 복음서에 대한 독립적 증거로서 요세푸스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데, 인용할 때마다 다르게 인용한다.
다시 말해서 요세푸스의 텍스트가 고정적이질 않았다는 증거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요세푸스의
『유대인 고대사』의 예수 단락 자체가 유세비우스 자신의 날조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이라는 표현은 매우 인위적이다. 한 인간으로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 대단하다는 긴장감을 삽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사람은 그리스도였다”라는 표현도 해괴하다.
요세푸스는 유대사를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들을 위하여 쓴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표현은 매우 어색하다. 유대인을 빼놓고는 아무도 알아들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의 로마인들에게는
그냥 “그는 기름을 뒤집어쓴 자였다”라는 이상한 말로 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족속”이라는 표현도 특이하다. ‘족속(phyl)’이라는 표현은 객관화될 수 있는 한 국적의 인종을 말한다. 후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제3의 인종’으로 규정하여 말하는 용례가 있기는
하지만 요세푸스 시대에는 그토록 그리스도인들이 별개의 인종적 그룹으로서 특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여튼 이 요세푸스의 기록은 유대인의 기술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기독교적이고, 공평한 사가의 기술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신앙고백적이며, 진실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복음서의 기술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기록을 반드시 후대 기독교인들의 날조라고 볼 수만은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첫째, 필사자들이 약간의 변경을 했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전체를 날조했다고 주장할 만한 확실한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 날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토록 시시하게 조금만 서술했을 리가 없다.
세례 요한에 관한 기록에 비해 너무 초라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문체나 어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나는 이 요세푸스의 증언기록이 완벽하게 날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부분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단정한다.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이 사람은 그리스도였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라는 구절을 삭제해 버리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매우 재미있는 정보들을 얻게 된다.
예수는 현인(賢人)이었으며,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으며,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진리의 스승이었다. 여기에는 이적이나 부활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지체 높은 지도자들에 의해 고소되었고, 빌라도 자신의 판단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형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요세푸스 시대에까지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세푸스의 사가로서의 기술은 우리에게 별다른 새로운 정보를 전하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는 풍요로운 복음서의 기술 속에서 역사적 예수를 발굴하는 작업으로 진입해야 한다.
그 작업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처형된 AD 30년과 마가복음이 집필된 AD 70년 사이 40년간의 역사에 관한
매우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 바로
도마복음서의 발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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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4-03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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