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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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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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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 (3)

눈이 와서 외로왔던 남자 '빈'과 그 남자의 이야기를 자기 것인양 안아들인 숙이 주고 받은 편지가 벌써 스무통이 넘었다.
어느 날에 빈은 이제 눈이 와도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했고, 그 다음 날은 내리는 눈을 치우는 일이 이젠 즐거움이라는 고백을 숙에게 했었다.

빈은 제대를 앞둔 고참 병장이라는 것과 숙과는 동갑의 나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외에 그들이 편지로 주고 받은 사연으로 서로의 신상에 관해서 알게 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제대를 하면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될 것이며 아마추어 권투선수로 활동했던 학창시절 이야기를 몇 번에 걸쳐 흥분이 섞인 말투로 신이 나서 편지에 썼었다.
상대방에게 맞아 되받아칠 기운이 전혀 없이 넉다운이 되어 링에 쓰러졌을 때, 그 때 링에 누워서 느끼는 평안함 같은 것을 이야기 할 때가 어떤 상을 어떻게 타고 어떤 상대와 어떻게 싸웠는지를 이야기 할 때 보다 그는 더 진지했었다.
숙은 그가 하는 이야기 외에는 더 이상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빈은 그가 있는 깊은 산 속의 겨울과 그리고 봄, 여름, 가을을 이야기했고 그 계절의 풍경과 그 풍경을 바라보던 마음을 숙과 나누었다.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군인이 지나가버릴 그 세월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숙에게 모두 배달시킨 셈이었다.

소양호수 건너 청평사.
청평사는 숙이 대학 1년생이었던 그 해 겨울에 왔던 곳이다.
눈 내리는 소양호수와 눈에 덮힌 청평사의 고즈넉함에 반한 숙이 그 때 혼자 한 약속으로 아직 다시 찾지 않은 곳이다.
그 때 숙은 혼자 약속했었다. 이 곳을 다시 찾을 때는 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이어야 한다고...

거의 매일 배달 되어온 편지가 스무통이 넘어설 무렵 그들의 역사가 시작된지 꼭 한달이 되었다. 그리고 숙과 빈이 만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하루 정도의 시간 여유만 있어도 여행을 즐기던 숙이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그렇게 두고두고 아껴왔던 곳이 청평사였다.
숙이 그렇게도 아끼던 청평사에 왔다. 빈을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숙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쌓인 눈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숙은 청평사 본당 앞을 맴돌다가 뒤로 돌아 산 길을 밟다가 또 내려오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잠시를 가만 있지를 못하고 절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응달을 벗어나 눈이 조금씩 녹아들어가다가 찬 기운에 다시 얼어버린 눈 위에서 숙은 미끄러지며 굵은 소나무 옆으로 뒹굴었다. 발목을 덮도록 쌓인 눈이 넘어진 숙에게 포근하게 안겨들어왔다.
시리게 하늘은 푸르르고 섬광으로 반짝이던 빛. 그 빛에 눈을 뜰 수 없어 부신 눈을 감을 때 숙은 보았다. 미쳐 하지 못하는 말을 삼키고 있는 눈, 그리고 그 눈가의 작은 검은 점.
까마득히 어릴 적,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났던 그 아이를 숙이 떠올리고 있었다.


일년 후, 크리스마스 이브.

그 날, 그러니까 일 년전 청평사에서 만난 숙과 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빈이 제대하면서 편지로만 주고 받던 마음을 눈으로, 손으로, 몸으로 주고 받으며 일년을 보냈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결혼날로 잡아 그들이 결혼하는 날이다.

숙이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빈을 만난 바로 그날 청평사에서였다.
군인복장의 다부진 차림이던 빈을 한 눈에 알아보고 숙은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던지 모른다. 서로 쑥스러워 어찌할 줄 모르며 산길을 오르내리며 시간을 죽여갈 때 쯤, 애써 긴장됨을 참던 빈이 병장 계급장도 자랑스러운 모자를 벗었다.
쌓인 흰 눈에 반사된 눈 부신 햇빛 그 너머로 숙은 보았다. 빈의 오른쪽 눈썹 위에 있던 자그마한 검은 점을.
그건 운명이었다, 숙에겐.
엄마의 완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숙에겐 넘지 못한 장애를 전혀 되지 못했다. 그날부터 숙에게 빈은 운명이 되고 말았으니까...

눈처럼 하얀 웨딩드레스에 머리에는 흩날리듯 사뿐히 내려앉은 반짝이는 자그마한 관을 이고 동그랗게 말린 앙증맞은 부케를 들고 숙은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의 시선을 기꺼워하며 속으로 노래라고 부르는가 숙의 얼굴은 환하게 피어나고 얼마쯤 앞에서 기다리는 빈은 웃음을 잔뜩 머금고 곧 소리라도 질러 환호할듯이 아주 행복한 표정이었다.
단 위에 둘은 나란히 섰다.
마주보고 서로에서 깊은 인사를 나누고 사방에서 카메라 후레쉬가 터져나왔다.
“번쩍!” 또 “번쩍!”
그 때, 숙은 보았다. 빈의 오른쪽 눈썹 위의 점과 오래 전 크리스마스 이브, 그 아이의 왼쪽 눈썹 위의 점을 보았다.

(끝)

* * * * * * * * * *

글을 쓰면서 마음 먹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숙'이라고...
숙은 내 어릴 적부터 숙이 나인듯, 내가 숙인듯한 친구였고
서른을 겨우 넘긴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 가버린 너무도 그리운 어릴 적 친구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숙의 이름을 빌리기도 했지만 숙의 첫사랑의 끝자를 빌리기도 했습니다.
“빈.”
혹... '빈'이라는 이름끝자를 가지고 '숙'이라는 이름끝자의 첫사랑을 가진 남자,
그 남자를 만나면 숙의 마지막 이야기를 꼭 해주어야 하는데...






작성일2012-12-08 22:29

초롱에미님의 댓글

초롱에미
이런~~~  좀 천천히 올릴걸... 수정이가 말 안듣는 앤거 잘 알면서...
오자...많네~~~ ㅎㅎ

김기자님의 댓글

김기자
수정이가 영영 말을 안들을까 걱정입니다.

빈이라는 이름 끝자를 가진 님이
숙이씨의 마지막 이야기를 꼭 들을날을 기대하며

다음 단편을 또 기대해 보겠습니다 ^^

깜깜이님의 댓글

깜깜이
소설은 해피엔딩인데 실지는 아니네요.ㅜㅜ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이야기 어떻게되나 한줄 한줄 재밌게 읽었어요. 아쉽네요 끝나나까.
또 해줘요. 장편으로. 아님 단편 많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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