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가려운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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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가려운 자들
어떤 개독 먹사의 글
바나바와 바울 만남
인간의 역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가정이 시작되고
동지(同志)와 동지가 만나면 국가가 형성되고
친구와 친구가 만나면 온갖 일이 시작되고
스승과 제자가 만나면 학교가 세워지고
자본가와 기술자가 만나면 회사가 세워진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만남으로 가정이 시작되었고
요셉이 바로를 만남으로 애굽을 도탄에서 건져냈고
모세가 아론을 만남으로 이스라엘을 노예에서 구원했고
사무엘이 사울을 만남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졌고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와 만남으로 교회를 땅위에 건설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되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또 무슨 일로 어떻게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이 사람을 잘못 만나면 일평생 고생만 하고 마지막에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지고 만다.
발람은 발락(모압 왕)을 잘못 만나 영원히 타락한 선지자의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삼손은 들릴라를 잘못 만나 두 눈을 빼이고 비참한 죽음을 죽었다.
아합왕은 이세벨을 잘못 만나 패가망신을 했다.
그런가 하면 룻은 보아스를 잘 만나 메시야의 대를 이었다.
다윗은 요나단을 잘 만나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형제들은 예수님을 잘 만나 영원히 존귀함을 받는 사도가 되었다.
사람이 한평생 사는 동안에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고
사람이 한평생 사는 동안에 나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성경에 좋은 사람을 만나 좋게 된 사람들 가운데 첫 손가락을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바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바울은 바나바를 만남으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못지않은 사도가 되었다.
이하 생략
윗글은 어떤 개독 먹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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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럴 뜻한 말이다. 그러나 일리(一理)는 있어도 진리(眞理)에서는 멀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모든 것을 <성경>으로부터 알고, 이해하고, 믿는다.
성경에 없거나, 성경적으로 이해되지 못한 것은 ‘이해되고, 믿음이 올 때 까지’ 남겨둔다.
‘인간사’(人間事)는 사람과 사람이 만남으로부터 시작’ 되겠지만
‘창조자의 역사’는 그의 경륜(徑輪=로고스)을 시간에 맞추어 움직임으로 시작되고, 진행되고 이루신다.
그래서 계시록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했다.
위의 글에서 ‘인간의 역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는 오메가도 아니요, 나중도 아니며, 끝이 아니다.
무엇이었는가?
글쓴이는 ‘사람과 사람이 만남으로’
‘가정이 시작, 국가가 형성, 온갖 일이 시작, 학교가 세워지고, 회사가 세워지고, 애굽을 도탄에서 건져냈고, 이스라엘을 노예에서 구원했고,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졌고, 다윗이 스라엘의 왕, 메시야의 대를 이었고, 영원히 타락한 선지자, 패가망신, 두 눈을 빼이고 비참한 죽음, 교회를 땅위에 건설했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형제들은 예수님을 잘 만나 영원히 존귀함을 받는 사도’가 되었다고 말한다.
모두가 이 땅에서의 ‘불행이나, 망한 것’과 ‘잘된 것, 성공한 것, 잘 먹고 잘살았다’는 말 밖에 안 된다.
오늘 날 교회란 곳에서의 설교자들은 ‘이 세상에서 잘되고, 잘 사는 이야기들’로 가득 채운다.
‘귀가 가려운 자들’은 ‘귀를 즐겁게 해주는 소리’를 즐겨 들으며, 기뻐하고, 믿고, 아멘 한다.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리를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근본 목적(과녁, target)이, 경륜(徑輪=로고스)이 그런 것이고 그 끝이 그런 것들인가?
물론 ‘구약에서의 목적’과 ‘신약에서의 목적’은 같지 않다지만 모두가 인간적인 생각이 전부다.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던’ ‘하나님의 과녁에서 빗나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과녁(=목표, 목적)’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들에게는 우수개 소리 같게 들리겠지만 ‘우주의 창조 목적’이, ‘아브람을 택한 목적’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한 목적’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목표’를 위한 진행과정(경륜)이다.
아래 성경 구절 중에 13,14절은
구약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목표’를 위한 진행과정(경륜)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도구>들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멀리서 보고 환영하기만 했지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
도대체 그 ‘약속’이란 무엇인가?
히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들(1860 에팡겔리아)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약속들을 받지 못한 그것들’ --- ‘약속들’ 몇 개의 어떤 약속들이가?
신약에 있는 ‘약속’(1860 에팡겔리아)이란 단어들을 다 찾아보면 ‘아들의 언약’과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지적하는 구절들로 가득하다.
즉 ‘물 침례의 죄 사함’의 약속과
‘성령침례의 생명’의 약속이다.
신약성경에서 ‘약속’(1860 에팡겔리아)이란 단어가 있는 구절들 중에 거의가 ‘성령’이나 ‘아들과 죄 사함’과 연관된 구절들이다. 그렇지 않는 구절들은 주로 구약의 예언과 관계된 구절들이다.
50회 : 눅 24:49, 행 1:4, 행 2:33, 행 2:39, 행 7:17, 행 13:23, 행 13:32, 행 23:21, 행 26:6, 롬 4:13, 롬 4:14, 롬 4:16, 롬 4:20, 롬 9:4, 롬 9:8, 롬 9:9, 롬 15:8, 고후 1:20, 고후 7:1, 갈 3:14, 갈 3:16, 갈 3:17, 갈 3:18, 갈 3:21, 갈 3:22, 갈 3:29, 갈 4:23, 갈 4:28, 엡 1:13, 엡 2:12, 엡 3:6, 엡 6:2, 딤전 4:8, 딤후 1:1, 히 4:1, 히 6:12, 히 6:15, 히 6:17, 히 7:6, 히 8:6, 히 9:15, 히 10:36, 히 11:9, 히 11:13, 히 11:17, 히 11:33, 히 11:39, 벧후 3:4, 벧후 3:9, 요일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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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롬 15: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고후6: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이하 16절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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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1242 디아데케)의 피니라
막 14: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1242 디아데케)의 피니니라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행 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행 26:6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이하 30여 구절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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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하나님의 과녁(=과녁)’은 ‘구원’이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이 구원은‘죄로부터 구원’과 ‘사망으로부터 구원’(죄 사함과 생명)을 받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대개의 설교자들은 ‘죄로부터 구원’ 받는 ‘물 침례’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으며,
‘사망으로부터 구원’(죄 사함과 생명) 받는 ‘성령침례’가 <영생>이 된다는 건 믿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냥 막연하게 ‘예수를 믿었으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만 말한다.
요일3: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4 We know that we have passed from death unto life, because we love the brethren. He that loveth not [his] brother abideth in death.
사망을 지나서 생명으로 들어감. 사망을 통과하는 과정 없이 생명으로 들어 갈수는 없다.
도대체 14절에서 말하는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우리’라는 이들은 이미 ‘죄 사함’과 ‘생명을 받은 자들’ 곧 거듭난 동기(同氣) 간이기에 <형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서로 사랑하는 형제지간>이 아니라면 그들은 ‘거듭난 자들’이 아니며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자들’도 아니다.
다시 구약시대에
히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들(1860 에팡겔리아)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구약시대에 ‘하나님’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늘에 있는’ ‘한 성을 예비’하셨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위해서는 ‘한 성을 예비’하시지는 않았다.
왜인가? 아래 구절을 보라
히11:12~16에서 22절을 내려와 히11:38~40에서 다시 ‘받지 못한 약속들’에 관하여 다시 등장한다.
히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분명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한 성을 예비’하셨으나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위해서는 그 한 성보다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아는가? (구약시대에 ‘의로운 자들’과 신약시대에 ‘거듭난 자들’이 가는 곳이 동일하지 않다는 말이다.)
귀가 가려운 자들은 이 세상에서 사욕을 채울 스승을 많이 두고, 허탄한 이야기를 더 즐기며, 바른 교리를 받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심판이 예비 되어 있을 뿐 ‘한 성도 예비 된 것’이 없고, ‘더 좋은 것’은 더 더욱 없다.
우리에게 예비 된 ‘더 좋은 것’이 무엇일까?
그날이 오기 전에는 감히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다만 exciting 할 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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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3-22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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