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명은 예정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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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의 기원과 발전
고대에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이 별에 의해 인도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러한 관습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분류되어 목록이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바빌로니아’의 점장이들은—개개인의 인생 행로를 예측하려는 목적으로—어떤 행성의 조짐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고딕’체로는 본지가) 그리하여 후일의 신앙을 위한 기초가 놓여졌다.
‘바벨론’으로부터 그러한 생각이 퍼져나가 지구상의 다른 지역에서 발전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전에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생각에 스며들었다. 제 1세기 역사가 ‘요세퍼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것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 준다. “‘바리새’인들은 ··· 모든 것의 원인을 운명이나 하나님에게 돌렸다”고 그는 썼다. 회교의 ‘코란’에 따르면, “‘알라’의 허락이 없이는, 그리고 정해진 기간이 차지 않고는 아무 영혼도 결코 죽을 수 없다.”—수라 3:145, ‘모하메드 피크탈’역.
예정(또는 숙명)의 교리는 5세기에 ‘로마 가톨릭’의 “성인” ‘오거스틴’에 의해 그리스도교국에 소개되었다. 그것은 때때로 ‘오거스틴’의 교리라고 불리운다. ‘가톨릭’ 교회는, ‘오거스틴’이 가르친 정도로는 아니지만 아직도 그 교리를 고수하고 있다. 「신 가톨릭 백과사전」, 제 11권, 713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은 모든 일들을 미리 알고 계시며 미리 정해 놓으신다.”—또한 714면의 “‘가톨릭’ 신학의 예정론”이라는 제목 이하 참조.
제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자 ‘존 캘빈’은 ‘오거스틴’처럼 보다 노골적이었다. ‘캘빈’은 “예정론”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며, 그것에 의해 그분은 자신이 인류 개개인이 어떻게 되게 할 것인지를 정해 오셨다. 그들은 모두 유사한 운명으로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미리 운명지어져 있다”고 정의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우리의 운명을 포함해서 모든 개개인의 운명을 정해 놓으셨다고 한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친 광범위한 영향
‘캘빈’의 영향은 매우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점을 설명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매우 발전한 나라들인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캘빈’주의 신앙을 둘러싸고 16세기와 17세기에 커다란 정치적 및 문화적 투쟁을 벌였다. ··· 예정론의 교리는 가장 특징을 이루는 신조로 간주되었다 ··· 그것은 교회 투사의 무수한 영웅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그것은 ··· 새로이 깨우친 중대한 점들의 구호가 되었다.”—‘고딕’체로는 본지가.
‘캘빈’주의에서 “가장 특징을 이루는” 이 교리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점에 관해 평하면서,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극소화하였고, 그리하여 자신이 선택받았다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과신을, 보장받을 수 없던 사람들에게는 절망을 가져다 주었다.” 때때로 그러한 “과신”이 전체 사회에 만연하였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종족”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또한 미개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종족들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정론은 또한 남‘아프리카’에 있는 흑인과 백인에게 매우 보편적인, 생명에 대한 숙명적인 견해를 조장한다. 이것은 특히 그곳의 ‘네덜란드’ 신교와 장로교로부터 받은 강력한 ‘캘빈’주의적 영향을 고려할 때 이해할 만하다. 사망 사건의 경우에, 그 나라에 있는 ‘크소사스’는 때때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자기에게 속한 것을 죽일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말은 하나님이 죽음을 가져오시므로,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소유의 양을 죽일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정론에 대한 신앙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게 할 수 있다. 재난이나 심각한 질병이 닥치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설 수 있다. 그러한 믿음은 또한 무모함으로 인도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떠한 위험을 무릅쓴다해도, 자기들의 생명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라야 끝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일부 북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에서는 이러한 생각에서 무모한 운전을 하여 생명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성서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성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 (창세 1:26) 그러한 “모양”은 신체적인 외양이 아니라 특성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창조주께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행하실 수 있는 것처럼, 그분은 사람이 자유 의지를 갖도록 창조하셨다. 창조주께서는 이 점을 무시하시고 개개인이 취할 행로를 정하거나 예정해 놓지 않으신다. 이것은 장래를 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모순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사람은 집에서 세계의 ‘뉴우스’를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지만. 먼저 정확한 때에 ‘라디오’를 켜고 올바른 방송국을 선택해야 한다. 창조주의 예지력도 이와 같다. 그분은 그것을 임의적이고 선택적으로 사용하셔서 그분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신다.
성서는 우연의 일치나 재난이 흔히 “시기와 우연”의 문제라고 가르친다. (전도 9:11, 12) 예를 들어, 혼잡한 교차로를 생각해 보라. 안 좋은 “시기”의 제동장치 고장과 같은 “우연”은 치명적인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에 대해 책임이 있으시다거나 그러한 일을 미리 정해 놓으신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책임을 깨닫기 때문에 “건전한 정신”으로 운전하려고 노력하며 자신들의 자동차가 차도에 나가기에 합당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살필 것이다.—디모데 후 1:7, 신세.
인류의 최후의 운명에 대해, 성서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마련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서 특정한 한 반열을 “부르”셨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늘에서의 생명에 예정되어 있으며 그 수는 144,000명으로 정해져 있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그들은 인류의 축복을 위한 하늘 정부를 구성할 것이다. (로마 8:29, 30; 계시 14:1-3; 20:1-4) 이 반열과 그 수가 “예정”되어 있지만, 이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에 관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의 부름에 따라 생활하지 못하여 대치를 요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주어졌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시 3:11; 또한 마태 24:13; 빌립보 3:12, 13; 베드로 후 1:10; 유다 3-5 참조.
다른 두 가지 가능성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들과 마침내 전부 생명을 잃을 자들에 대한 것이다. 두 가지 경우는 모두 그 수자나 사람들이 정해져 있지 않다. 결정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창조주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망의 길”을 가고 있다면 바꾸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초대하신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또한, 만일 어떤 사람이 “생명의 길”을 선택했다면, 그는 그 길에 머무르기 위해 주의해야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경고를 마음에 간직한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예레미야 21:8; 에스겔 33:11, 13.
“생명의 길”을 선택하고 머무르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장래가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거나 하나님의 새 질서로 생존해 들어감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즐기게 될 전망을 가진다. (시 37:10, 11, 29; 요한 11:25)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 6:23) 그 고귀한 “은사”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떠한 일이 포함되는가? 이 잡지를 배부하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대가나 부담을 지우지 않고 당신의 집에서 당신과 함께 이 문제에 관해 기꺼이 이야기하고자 할 것이다.
예정론의 기원과 발전
고대에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이 별에 의해 인도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러한 관습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분류되어 목록이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바빌로니아’의 점장이들은—개개인의 인생 행로를 예측하려는 목적으로—어떤 행성의 조짐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고딕’체로는 본지가) 그리하여 후일의 신앙을 위한 기초가 놓여졌다.
‘바벨론’으로부터 그러한 생각이 퍼져나가 지구상의 다른 지역에서 발전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전에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생각에 스며들었다. 제 1세기 역사가 ‘요세퍼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것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 준다. “‘바리새’인들은 ··· 모든 것의 원인을 운명이나 하나님에게 돌렸다”고 그는 썼다. 회교의 ‘코란’에 따르면, “‘알라’의 허락이 없이는, 그리고 정해진 기간이 차지 않고는 아무 영혼도 결코 죽을 수 없다.”—수라 3:145, ‘모하메드 피크탈’역.
예정(또는 숙명)의 교리는 5세기에 ‘로마 가톨릭’의 “성인” ‘오거스틴’에 의해 그리스도교국에 소개되었다. 그것은 때때로 ‘오거스틴’의 교리라고 불리운다. ‘가톨릭’ 교회는, ‘오거스틴’이 가르친 정도로는 아니지만 아직도 그 교리를 고수하고 있다. 「신 가톨릭 백과사전」, 제 11권, 713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은 모든 일들을 미리 알고 계시며 미리 정해 놓으신다.”—또한 714면의 “‘가톨릭’ 신학의 예정론”이라는 제목 이하 참조.
제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자 ‘존 캘빈’은 ‘오거스틴’처럼 보다 노골적이었다. ‘캘빈’은 “예정론”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며, 그것에 의해 그분은 자신이 인류 개개인이 어떻게 되게 할 것인지를 정해 오셨다. 그들은 모두 유사한 운명으로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미리 운명지어져 있다”고 정의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우리의 운명을 포함해서 모든 개개인의 운명을 정해 놓으셨다고 한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친 광범위한 영향
‘캘빈’의 영향은 매우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점을 설명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매우 발전한 나라들인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캘빈’주의 신앙을 둘러싸고 16세기와 17세기에 커다란 정치적 및 문화적 투쟁을 벌였다. ··· 예정론의 교리는 가장 특징을 이루는 신조로 간주되었다 ··· 그것은 교회 투사의 무수한 영웅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그것은 ··· 새로이 깨우친 중대한 점들의 구호가 되었다.”—‘고딕’체로는 본지가.
‘캘빈’주의에서 “가장 특징을 이루는” 이 교리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점에 관해 평하면서,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극소화하였고, 그리하여 자신이 선택받았다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과신을, 보장받을 수 없던 사람들에게는 절망을 가져다 주었다.” 때때로 그러한 “과신”이 전체 사회에 만연하였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종족”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또한 미개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종족들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정론은 또한 남‘아프리카’에 있는 흑인과 백인에게 매우 보편적인, 생명에 대한 숙명적인 견해를 조장한다. 이것은 특히 그곳의 ‘네덜란드’ 신교와 장로교로부터 받은 강력한 ‘캘빈’주의적 영향을 고려할 때 이해할 만하다. 사망 사건의 경우에, 그 나라에 있는 ‘크소사스’는 때때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자기에게 속한 것을 죽일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말은 하나님이 죽음을 가져오시므로,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소유의 양을 죽일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정론에 대한 신앙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게 할 수 있다. 재난이나 심각한 질병이 닥치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설 수 있다. 그러한 믿음은 또한 무모함으로 인도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떠한 위험을 무릅쓴다해도, 자기들의 생명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라야 끝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일부 북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에서는 이러한 생각에서 무모한 운전을 하여 생명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성서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성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 (창세 1:26) 그러한 “모양”은 신체적인 외양이 아니라 특성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창조주께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행하실 수 있는 것처럼, 그분은 사람이 자유 의지를 갖도록 창조하셨다. 창조주께서는 이 점을 무시하시고 개개인이 취할 행로를 정하거나 예정해 놓지 않으신다. 이것은 장래를 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모순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사람은 집에서 세계의 ‘뉴우스’를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지만. 먼저 정확한 때에 ‘라디오’를 켜고 올바른 방송국을 선택해야 한다. 창조주의 예지력도 이와 같다. 그분은 그것을 임의적이고 선택적으로 사용하셔서 그분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신다.
성서는 우연의 일치나 재난이 흔히 “시기와 우연”의 문제라고 가르친다. (전도 9:11, 12) 예를 들어, 혼잡한 교차로를 생각해 보라. 안 좋은 “시기”의 제동장치 고장과 같은 “우연”은 치명적인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에 대해 책임이 있으시다거나 그러한 일을 미리 정해 놓으신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책임을 깨닫기 때문에 “건전한 정신”으로 운전하려고 노력하며 자신들의 자동차가 차도에 나가기에 합당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살필 것이다.—디모데 후 1:7, 신세.
인류의 최후의 운명에 대해, 성서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마련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서 특정한 한 반열을 “부르”셨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늘에서의 생명에 예정되어 있으며 그 수는 144,000명으로 정해져 있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그들은 인류의 축복을 위한 하늘 정부를 구성할 것이다. (로마 8:29, 30; 계시 14:1-3; 20:1-4) 이 반열과 그 수가 “예정”되어 있지만, 이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에 관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의 부름에 따라 생활하지 못하여 대치를 요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주어졌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시 3:11; 또한 마태 24:13; 빌립보 3:12, 13; 베드로 후 1:10; 유다 3-5 참조.
다른 두 가지 가능성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들과 마침내 전부 생명을 잃을 자들에 대한 것이다. 두 가지 경우는 모두 그 수자나 사람들이 정해져 있지 않다. 결정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창조주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망의 길”을 가고 있다면 바꾸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초대하신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또한, 만일 어떤 사람이 “생명의 길”을 선택했다면, 그는 그 길에 머무르기 위해 주의해야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경고를 마음에 간직한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예레미야 21:8; 에스겔 33:11, 13.
“생명의 길”을 선택하고 머무르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장래가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거나 하나님의 새 질서로 생존해 들어감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즐기게 될 전망을 가진다. (시 37:10, 11, 29; 요한 11:25)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 6:23) 그 고귀한 “은사”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떠한 일이 포함되는가? 이 잡지를 배부하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대가나 부담을 지우지 않고 당신의 집에서 당신과 함께 이 문제에 관해 기꺼이 이야기하고자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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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1-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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