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온 순간에 있었던 일을 선지자가 상세히 설명 ( 시대의 소망 140,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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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렝이 예수님께 온 순간( 시대의 소망 140,141 )
나다나엘은 빌립이 불렀을 당시 조용한 숲 속에 물러가서 요한이 선포한 말과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을 명상하고 있었다. 그는 요한이 선언한 그분이 구주시라면 자기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위하여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빌립은 그의 친구가 예언의 말씀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에 빌립이 그의 은신처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무성한 나뭇잎으로 가려진 이 격리된 장소에서 종종 함께 기도했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는 기별은 나다나엘에게 자기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으로 보였다. 그러나 빌립은 아직까지도 흔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의심을 품은 말을 덧붙였다. 나다나엘의 마음속에 다시 선입견이 일어났다.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하였다.
빌립은 논쟁하지 않았다. 그는 “와보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다나엘은 놀라서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외쳤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홀로 기도하던 나다나엘에게 증거하였던 하나님의 영이 이제는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그에게 말씀하셨다.
의혹을 가지고 어느 정도 선입견에 빠져 있기는 했지만 나다나엘은 진리를 찾는 정직한 욕구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왔다. 이제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의 믿음은 자기를 예수께로 인도한 자의 믿음을 능가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이 랍비들의 지도를 신뢰했더라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제자가 된 것은 스스로 보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41 오늘날 선입견을 가지고 선으로부터 물러서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도 그러하다. 만일 그들이 “와 보”면 그 결과는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인간적인 권위의 지도를 신뢰하는 한 아무도 진리의 구원하는 지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다나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연구하고 성령의 깨우쳐 주심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을 보신 분은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고 있는 우리도 보실 것이다. 빛의 세계에서 내려온 천사들은 겸손하게 하늘의 지도를 구하는 자들 가까이에 있다.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는 요한, 안드레, 시몬,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름으로 시작되었다. 요한은 자기 제자 중 두 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 중 하나인 안드레가 그의 형제를 찾아 그를 불러 구주께로 인도하였다.
빌립은 부름을 받자 나다나엘을 찾으러 나갔다. 우리는 이러한 실례에서 우리의 인척과 친구와 이웃에게 직접적인 호소를 하는 개인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배워야 한다.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주께로 이끌기 위하여 개인적인 노력을 해 보지 않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모든 일을 목사에게 맡겨 버린다. 목사는 자기의 부르심을 위해서는 자격을 잘 갖추고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교인들이 행하도록 맡겨 주신 일을 할 수는 없다.
애정 어린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만일 이웃의 남녀 평신도들이 개인적인 노력을 하였더라면 구원받았을 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전도를 받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생활하는 바로 그 가정과 이웃과 도시에서 그리스도의 선교사로서 해야 할 사업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업은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면 즉시로 예수가 자기의 귀중한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남에게 알려 주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 생긴다. 구원하며 성화시키는 진리는 마음속에 가두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께 헌신한 모든 사람은 빛의 통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은혜의 부요함을 전하게 하신다. 그분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겔 34:26).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말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증언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스스로 보도록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제 하늘에 올라가 계시므로 그분의 제자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의 대표자가 된다.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실증하는 것이다.
142 다른 이에게 끼치는 우리의 감화는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사람됨에 더 크게 좌우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논리에 도전하고 반박하고 우리의 호소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심 없는 사랑의 생애는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이다.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으로 특징지어진 언행일치의 생활은 세상에서 한 능력이 되는 것이다.
나다나엘은 빌립이 불렀을 당시 조용한 숲 속에 물러가서 요한이 선포한 말과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을 명상하고 있었다. 그는 요한이 선언한 그분이 구주시라면 자기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위하여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빌립은 그의 친구가 예언의 말씀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에 빌립이 그의 은신처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무성한 나뭇잎으로 가려진 이 격리된 장소에서 종종 함께 기도했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는 기별은 나다나엘에게 자기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으로 보였다. 그러나 빌립은 아직까지도 흔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의심을 품은 말을 덧붙였다. 나다나엘의 마음속에 다시 선입견이 일어났다.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하였다.
빌립은 논쟁하지 않았다. 그는 “와보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다나엘은 놀라서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외쳤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홀로 기도하던 나다나엘에게 증거하였던 하나님의 영이 이제는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그에게 말씀하셨다.
의혹을 가지고 어느 정도 선입견에 빠져 있기는 했지만 나다나엘은 진리를 찾는 정직한 욕구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왔다. 이제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의 믿음은 자기를 예수께로 인도한 자의 믿음을 능가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이 랍비들의 지도를 신뢰했더라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제자가 된 것은 스스로 보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41 오늘날 선입견을 가지고 선으로부터 물러서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도 그러하다. 만일 그들이 “와 보”면 그 결과는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인간적인 권위의 지도를 신뢰하는 한 아무도 진리의 구원하는 지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다나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연구하고 성령의 깨우쳐 주심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을 보신 분은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고 있는 우리도 보실 것이다. 빛의 세계에서 내려온 천사들은 겸손하게 하늘의 지도를 구하는 자들 가까이에 있다.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는 요한, 안드레, 시몬,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름으로 시작되었다. 요한은 자기 제자 중 두 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 중 하나인 안드레가 그의 형제를 찾아 그를 불러 구주께로 인도하였다.
빌립은 부름을 받자 나다나엘을 찾으러 나갔다. 우리는 이러한 실례에서 우리의 인척과 친구와 이웃에게 직접적인 호소를 하는 개인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배워야 한다.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주께로 이끌기 위하여 개인적인 노력을 해 보지 않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모든 일을 목사에게 맡겨 버린다. 목사는 자기의 부르심을 위해서는 자격을 잘 갖추고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교인들이 행하도록 맡겨 주신 일을 할 수는 없다.
애정 어린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만일 이웃의 남녀 평신도들이 개인적인 노력을 하였더라면 구원받았을 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전도를 받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생활하는 바로 그 가정과 이웃과 도시에서 그리스도의 선교사로서 해야 할 사업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업은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면 즉시로 예수가 자기의 귀중한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남에게 알려 주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 생긴다. 구원하며 성화시키는 진리는 마음속에 가두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께 헌신한 모든 사람은 빛의 통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은혜의 부요함을 전하게 하신다. 그분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겔 34:26).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말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증언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스스로 보도록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제 하늘에 올라가 계시므로 그분의 제자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의 대표자가 된다.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실증하는 것이다.
142 다른 이에게 끼치는 우리의 감화는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사람됨에 더 크게 좌우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논리에 도전하고 반박하고 우리의 호소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심 없는 사랑의 생애는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이다.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으로 특징지어진 언행일치의 생활은 세상에서 한 능력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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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3-0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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