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 2의 테오스=신[god,神]or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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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는 성서 번역판에 따라서, 여러 가지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 성구들
만일 한 성구가 문법적으로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면, 정확한 번역은 어떤 것인가?
성서의 나머지 부분과 일치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서의 다른 부분을 무시하고
자기의 믿음을 특정한 구절의 마음에 드는 번역문을 중심으로 세워 나간다면,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기 개인의 견해나 혹은 다른 불완전한 사람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요 1:1, 2:
「개역」은 이러하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새」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신세」로는 다음과 같다
“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신이셨다.
그분은 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요한 1:1, 2의 어느 번역판이 그 문맥과 일치한가?
요한 1:18에서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알려 준다.
14절에서는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알려 준다.
또한 1, 2은 시초에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알려 준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일 수 있는가?
요한 17:3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가리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는 “신”으로서, 그분의 아버지의 신성을 반영할 뿐이다.—히브리 1:3.
“신”(a god)은 그리스어 문법에 맞게 번역한 것인가?
일부 참고 문헌들은 이 그리스어 성구를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다.
필립 B. 하너는 “특성을 나타내는 무관사 서술 명사: 마가 15:39과 요한 1:1”이라는 논문에서,
요한 1:1에 있는 것과 같이 “동사 앞에 무관사 서술어가 나오는” 절들은
“의미상 주로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로고스가 테오스의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말하였다.
하너는 이렇게 제안한다.
“아마도 그 절은 ‘말씀은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 문헌지」[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973년, 85, 87면)
따라서 이 구절에서, 두 번째로 나오는 테오스라는 단어에 정관사(호)가 없고
그 단어가 그리스어 문장에서 동사 앞에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요한 1:1을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번역자들도,
동사 앞에 단수 무관사 서술 명사가 나오는 다른 구절들을 번역할 때는, 부정관사(a, an)를 주저없이 사용한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서」와 「제임스 왕역」은 모두 요한 6:70에서
이스가리옷 유다를 “마귀”(a devil)로 언급하며, 요한 9:17에서는 예수를 “예언자”(a prophet)로 묘사한다.
예수회의 존 L. 매켄지는 그의 편저 「성서 사전」(Dictionary of the Bible)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요한 1:1은 엄밀히 말해 ‘말씀은 하나님[=아버지]과 함께 계셨고,
하나의 신성을 지닌 존재이셨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괄호 표시는 그가 한 것임. 가톨릭 교회의 공식 인가를 받아 출판되었음.)(뉴욕, 1965년판), 317면.
위의 사실과 일치하게, 「미역」의 번역은 이러하다.
“말씀은 신성이었다.” 「모펏」으로는 “로고스는 신성이었다”이다.
「신개정」으로는 “말씀은 신이었다”이다.
루드비히 팀메는 그의 독일어 번역판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말씀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 말씀을 “신”으로 부르는 것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 용어를 사용한 경우와 일치한다.
예를 들면, 시편 82:1-6에서는 이스라엘의 인간 재판장들이 “신들”로 언급되었다.
(히브리어, 엘로힘; 그리스어, 테오이, 요한 10:34 참조)
그들이 여호와를 대표하여 그분의 율법을 말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신세」 1984년 참조주판 부록, 1579면 참조.
만일 한 성구가 문법적으로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면, 정확한 번역은 어떤 것인가?
성서의 나머지 부분과 일치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서의 다른 부분을 무시하고
자기의 믿음을 특정한 구절의 마음에 드는 번역문을 중심으로 세워 나간다면,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기 개인의 견해나 혹은 다른 불완전한 사람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요 1:1, 2:
「개역」은 이러하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새」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신세」로는 다음과 같다
“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신이셨다.
그분은 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요한 1:1, 2의 어느 번역판이 그 문맥과 일치한가?
요한 1:18에서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알려 준다.
14절에서는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알려 준다.
또한 1, 2은 시초에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알려 준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일 수 있는가?
요한 17:3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가리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는 “신”으로서, 그분의 아버지의 신성을 반영할 뿐이다.—히브리 1:3.
“신”(a god)은 그리스어 문법에 맞게 번역한 것인가?
일부 참고 문헌들은 이 그리스어 성구를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다.
필립 B. 하너는 “특성을 나타내는 무관사 서술 명사: 마가 15:39과 요한 1:1”이라는 논문에서,
요한 1:1에 있는 것과 같이 “동사 앞에 무관사 서술어가 나오는” 절들은
“의미상 주로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로고스가 테오스의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말하였다.
하너는 이렇게 제안한다.
“아마도 그 절은 ‘말씀은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 문헌지」[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973년, 85, 87면)
따라서 이 구절에서, 두 번째로 나오는 테오스라는 단어에 정관사(호)가 없고
그 단어가 그리스어 문장에서 동사 앞에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요한 1:1을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번역자들도,
동사 앞에 단수 무관사 서술 명사가 나오는 다른 구절들을 번역할 때는, 부정관사(a, an)를 주저없이 사용한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서」와 「제임스 왕역」은 모두 요한 6:70에서
이스가리옷 유다를 “마귀”(a devil)로 언급하며, 요한 9:17에서는 예수를 “예언자”(a prophet)로 묘사한다.
예수회의 존 L. 매켄지는 그의 편저 「성서 사전」(Dictionary of the Bible)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요한 1:1은 엄밀히 말해 ‘말씀은 하나님[=아버지]과 함께 계셨고,
하나의 신성을 지닌 존재이셨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괄호 표시는 그가 한 것임. 가톨릭 교회의 공식 인가를 받아 출판되었음.)(뉴욕, 1965년판), 317면.
위의 사실과 일치하게, 「미역」의 번역은 이러하다.
“말씀은 신성이었다.” 「모펏」으로는 “로고스는 신성이었다”이다.
「신개정」으로는 “말씀은 신이었다”이다.
루드비히 팀메는 그의 독일어 번역판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말씀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 말씀을 “신”으로 부르는 것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 용어를 사용한 경우와 일치한다.
예를 들면, 시편 82:1-6에서는 이스라엘의 인간 재판장들이 “신들”로 언급되었다.
(히브리어, 엘로힘; 그리스어, 테오이, 요한 10:34 참조)
그들이 여호와를 대표하여 그분의 율법을 말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신세」 1984년 참조주판 부록, 1579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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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4-01 22:49
이대로님의 댓글
이대로
“신<테오스>”이라는 말은 심지어 마귀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는 현존하는 사물의 제도를 통솔하는 강력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후 4:4)
그는 현존하는 사물의 제도를 통솔하는 강력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후 4:4)
esus0님의 댓글
esus0
어떤 사람이 성서의 다른 부분을 무시하고
<자기의 믿음을 특정한 구절의 마음에 드는 번역문을 중심으로 세워 나간다면,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기 개인(또는 집단)의 견해나 혹은 다른 불완전한 사람(예로 여증 장로들)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여증드링여, 이대로여,
성경으로 돌아 가라, 성경의 본래의 멧세지를 외곡한 여증 장로들에게서 일단 떠나라
그리거 성경 원어에 매달려 진리를 찾아 소유하고, 그 <진리>에 순종하라
<자기의 믿음을 특정한 구절의 마음에 드는 번역문을 중심으로 세워 나간다면,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기 개인(또는 집단)의 견해나 혹은 다른 불완전한 사람(예로 여증 장로들)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여증드링여, 이대로여,
성경으로 돌아 가라, 성경의 본래의 멧세지를 외곡한 여증 장로들에게서 일단 떠나라
그리거 성경 원어에 매달려 진리를 찾아 소유하고, 그 <진리>에 순종하라
esus0님의 댓글
esus0
'마귀'는 당연히 '데오스'다.
그가 '엘로힘'이 아니면 그는 '마귀'가 아니다.
그가 '엘로힘'이 아니면 그는 '마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