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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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추도식이 마침 아버지 주일이었기에, 생전에 속을 썪여 드렸던 불효한 아들로서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가족들 앞에서 이런 설교를 하였습니다. 개골 개골 울지도 못하고 골개골개 우는 청개구리 심정으로 천국에서 바라보실 아버님을 생각하며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
*
*
Happy Father’s day 오늘은 아버지 날인데, 우리 온 가족들 특히 아버지 되시는 형님 동생님들께 주님의 넘치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어머님들이 계셨기에 우리들이 이 세상에 나왔고, 어머님들이 희생적으로 잘 키우셨기에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님에 대한 찬송도 많고 노래도 많은데, 거기에 비하면 아버님에 대한 찬송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너무 적습니다. 세상에는 참 좋은 아버지들이 많은데 말입니다.
최근 뉴스에 보니까 박세리가 골프 쳐서 모은 돈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였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돈을 마음대로 쓰고 다니다가 문제가 터졌는데, 하필 그러한 아버지의 유쾌하지 못한 뉴스가 거룩한 아버지 날에 발표가 되니 자녀를 셋이나 둔 아버지로서 고구마 먹은 기분이었지만, 세상에는 좋은 아버지가 참 많다는 사실에 힘을 얻어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21:28-31절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책망하고자 하여 하신 비유인데, 아버지의 날을 맞이하여 재 구성을 해 보았습니다;
본문의 아버지는 아들이 둘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님처럼 아들이 셋이었으면 문제가 또 달랐을 텐데 말입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 중 한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합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간다고 하고 안 갔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였더니 그 아들은 안 간다고 하고 나중에 뉘우치고 갔는데,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맏아들 둘째 아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흔히들 맏아들 에서와 야곱을 생각하며, 맏아들은 아버지 면전에서 착한 척 하고 뒷전에서는 나쁜 짓 하는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나쁜 놈 행세를 하지만 실제로는 그 아들이 더 착하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본 뜻을 흐리게 합니다.
두 아들, 맏아들인지 둘째 아들인지 그런 구별 없이 두 아들 중 한 아들에게 먼저 물어본 것입니다. 우리 성경이 잘못 번역이 되었는데, 개혁 개정은 고칠 줄 알았는데 고치지를 않네요.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가셨을 때 마르다가 마리아를 책망하자 예수님께서, “The one is Enough (한가지면 족하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음식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한가지를 택하라면, 음식보다는 말씀을 듣는 것이면 족하다 라는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하튼 신약성경에 몇 군데 더 있고, 구약성경은 여러 곳이 되는데, 처음 잘못 번역된 것을 우리 신학자들이 제대로 고치지 않아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지 성경이 잘못된 것 아닙니다.
여하튼 먼저 물어본 아들은, “네 아버님, 가겠습니다” 하고서 가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그가 왜 안 갔는지 거기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기 때문에 알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아들에게 똑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안 가겠다 고 합니다.
일하기 싫으니 안 가겠다는 것이었겠지요.
아버지 마음이 안 좋았겠지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 자신이 잘못했거든요. 아버지께서 화를 내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위하여 스스로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다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 물어보았던 아들이나 나중에 물어 보았던 아들이나 모두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먼저 물어본 아들은 우선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간다고 대답하였다가, 실제로 일을 하려고 하니 너무 버거워 안간 것 같습니다.
나중에 물어본 아들은,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고 안 간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간 것입니다.
오늘날 주변을 보면 먼저 물어보았던 그 아들이 출세를 합니다. 우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한 후, 실제로 할 것인가 아닌가는 나중에 생각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 보면, 선거철에는 국민만 바라보고 국민을 위하여 일한다고 아주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런 사람들이 당선됩니다. 그런데 선거 끝나고 나면 국민은 뒷전이고 자기 출세에 줄서기 바빠집니다.
대통령 주변에 살아남는 사람들을 보면 국민 보다는 대통령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목사들도 담임목사를 위하여 일해야지 교인들을 위하여 일하면 담임목사 눈 밖에 나기 쉽습니다.
한편 나중에 물어본 아들은 정직하지만 현실 감각이 좀 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를 개혁하고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구할 수 있겠지만, 장애물들과 반대파들이 너무 많아 거기에 이르기 전에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중에 물어본 아들처럼 살기를 원하지만 실행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이유는, 우선 아버지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다음으로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가기 싫은 포도원에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물어본 아들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먼저 물어본 아들처럼 되기 쉽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연 먼저 물어본 아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소개할 아들이 또 하나 있는데, 이는 바로 세 번째 물어본 아들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 세 번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제가 지어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세 번째 아들에게 속하지 않는가 해서 입니다.
이 세 번째 물어본 아들은, “왜 나만 가야 돼요? 안가요” 라고 한 아들입니다. 먼저 물어본 아들처럼 가겠다고 입술로도 순종하지 않았고,
나중 물어본 아들처럼 안 간다고 하고서 나중에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안 간다고 선포하고 정말로 안간 것입니다.
세 아들 중 제일 나쁜 아들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 세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 아버님 같았으면 어떠하셨을까?
어제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법정에 갔었습니다.
37먹은 아주 핸썸하고 똑똑하고 착한 아들, 보통 때에는 자기 어머니를 그렇게 잘 챙기는데 한번 돌았다 하면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나가서 온갖 욕을 하고 다니니까 이웃 사람들이 신고해서, 경찰서에 드나들다가 이제는 법정에 서게 된 겁니다.
한 30분, 길면 1시간 걸리겠다 하고 들어 갔는데, 법정에 들어서자 깜빡 놀랐습니다, 왜 이렇게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까?
수갑을 채고 온 사람들도 10명도 넘었고, 변호사를 동반하여 온 사람도 여러 명 되었고,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Case Worker하고 같이 나온 사람, 이 집처럼 혼자 나온 사람도 많았습니다.
나는 이 많은 사람들의 케이스가 언제 다 끝나나, 판사도 힘들겠다 라며, 법정의 이 딱딱한 의자에 앉아 졸기 시작하였는데, 70이 훨씬 넘은 이 어머니는 무엇이 그렇게 사랑스러운지 연신 자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나하고는 달랐을 까요?
난 교인 아들 도와 주려고 왔고, 이 어머니는 자기의 아들이니까 이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어머니처럼, 오늘 본문의 이 아버지께서도 그리고 우리 아버님도 이 세 번째 아들, 안가요, 왜 나만 시켜요 라며 끝까지 가지 않은 아들도 다른 두 아들처럼 사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왜냐, 나도 아버지의 아들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님도 완벽하고는 거리가 멀으신 분, 아들인 내 눈으로도 흠집 많고 바보스럽고 부족하기 그지 없으신 분이었지만, 내 아버지 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그리고 보고 싶습니다.
오늘 같은 여름날에는 뒷밭에 가서 오이도 따고 고추도 따고 마늘도 까놓고 장독의 고추장 항아리 열어서 벌건 고추장 한숱갈 떠서 종지에 담아 아버지 좋아하시던 시원한 막걸리 한잔 대접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버님 대접에 술 딸아 드리면서, “이제는 세 번째 물어본 그 아들이 아니라, 첫 번째 물어본 아들도 두 번째 물어본 아들도 아닌, 아버지께서 물으시기 전에 아버지 농장에 가서 일하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데……
2024년 아버님 추도식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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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Father’s day 오늘은 아버지 날인데, 우리 온 가족들 특히 아버지 되시는 형님 동생님들께 주님의 넘치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어머님들이 계셨기에 우리들이 이 세상에 나왔고, 어머님들이 희생적으로 잘 키우셨기에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님에 대한 찬송도 많고 노래도 많은데, 거기에 비하면 아버님에 대한 찬송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너무 적습니다. 세상에는 참 좋은 아버지들이 많은데 말입니다.
최근 뉴스에 보니까 박세리가 골프 쳐서 모은 돈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였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돈을 마음대로 쓰고 다니다가 문제가 터졌는데, 하필 그러한 아버지의 유쾌하지 못한 뉴스가 거룩한 아버지 날에 발표가 되니 자녀를 셋이나 둔 아버지로서 고구마 먹은 기분이었지만, 세상에는 좋은 아버지가 참 많다는 사실에 힘을 얻어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21:28-31절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책망하고자 하여 하신 비유인데, 아버지의 날을 맞이하여 재 구성을 해 보았습니다;
본문의 아버지는 아들이 둘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님처럼 아들이 셋이었으면 문제가 또 달랐을 텐데 말입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 중 한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합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간다고 하고 안 갔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였더니 그 아들은 안 간다고 하고 나중에 뉘우치고 갔는데,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맏아들 둘째 아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흔히들 맏아들 에서와 야곱을 생각하며, 맏아들은 아버지 면전에서 착한 척 하고 뒷전에서는 나쁜 짓 하는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나쁜 놈 행세를 하지만 실제로는 그 아들이 더 착하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본 뜻을 흐리게 합니다.
두 아들, 맏아들인지 둘째 아들인지 그런 구별 없이 두 아들 중 한 아들에게 먼저 물어본 것입니다. 우리 성경이 잘못 번역이 되었는데, 개혁 개정은 고칠 줄 알았는데 고치지를 않네요.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가셨을 때 마르다가 마리아를 책망하자 예수님께서, “The one is Enough (한가지면 족하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음식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한가지를 택하라면, 음식보다는 말씀을 듣는 것이면 족하다 라는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하튼 신약성경에 몇 군데 더 있고, 구약성경은 여러 곳이 되는데, 처음 잘못 번역된 것을 우리 신학자들이 제대로 고치지 않아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지 성경이 잘못된 것 아닙니다.
여하튼 먼저 물어본 아들은, “네 아버님, 가겠습니다” 하고서 가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그가 왜 안 갔는지 거기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기 때문에 알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아들에게 똑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안 가겠다 고 합니다.
일하기 싫으니 안 가겠다는 것이었겠지요.
아버지 마음이 안 좋았겠지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 자신이 잘못했거든요. 아버지께서 화를 내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위하여 스스로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다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 물어보았던 아들이나 나중에 물어 보았던 아들이나 모두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먼저 물어본 아들은 우선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간다고 대답하였다가, 실제로 일을 하려고 하니 너무 버거워 안간 것 같습니다.
나중에 물어본 아들은,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고 안 간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간 것입니다.
오늘날 주변을 보면 먼저 물어보았던 그 아들이 출세를 합니다. 우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한 후, 실제로 할 것인가 아닌가는 나중에 생각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 보면, 선거철에는 국민만 바라보고 국민을 위하여 일한다고 아주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런 사람들이 당선됩니다. 그런데 선거 끝나고 나면 국민은 뒷전이고 자기 출세에 줄서기 바빠집니다.
대통령 주변에 살아남는 사람들을 보면 국민 보다는 대통령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목사들도 담임목사를 위하여 일해야지 교인들을 위하여 일하면 담임목사 눈 밖에 나기 쉽습니다.
한편 나중에 물어본 아들은 정직하지만 현실 감각이 좀 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를 개혁하고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구할 수 있겠지만, 장애물들과 반대파들이 너무 많아 거기에 이르기 전에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중에 물어본 아들처럼 살기를 원하지만 실행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이유는, 우선 아버지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다음으로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가기 싫은 포도원에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물어본 아들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먼저 물어본 아들처럼 되기 쉽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연 먼저 물어본 아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소개할 아들이 또 하나 있는데, 이는 바로 세 번째 물어본 아들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 세 번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제가 지어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세 번째 아들에게 속하지 않는가 해서 입니다.
이 세 번째 물어본 아들은, “왜 나만 가야 돼요? 안가요” 라고 한 아들입니다. 먼저 물어본 아들처럼 가겠다고 입술로도 순종하지 않았고,
나중 물어본 아들처럼 안 간다고 하고서 나중에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안 간다고 선포하고 정말로 안간 것입니다.
세 아들 중 제일 나쁜 아들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 세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 아버님 같았으면 어떠하셨을까?
어제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법정에 갔었습니다.
37먹은 아주 핸썸하고 똑똑하고 착한 아들, 보통 때에는 자기 어머니를 그렇게 잘 챙기는데 한번 돌았다 하면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나가서 온갖 욕을 하고 다니니까 이웃 사람들이 신고해서, 경찰서에 드나들다가 이제는 법정에 서게 된 겁니다.
한 30분, 길면 1시간 걸리겠다 하고 들어 갔는데, 법정에 들어서자 깜빡 놀랐습니다, 왜 이렇게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까?
수갑을 채고 온 사람들도 10명도 넘었고, 변호사를 동반하여 온 사람도 여러 명 되었고,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Case Worker하고 같이 나온 사람, 이 집처럼 혼자 나온 사람도 많았습니다.
나는 이 많은 사람들의 케이스가 언제 다 끝나나, 판사도 힘들겠다 라며, 법정의 이 딱딱한 의자에 앉아 졸기 시작하였는데, 70이 훨씬 넘은 이 어머니는 무엇이 그렇게 사랑스러운지 연신 자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나하고는 달랐을 까요?
난 교인 아들 도와 주려고 왔고, 이 어머니는 자기의 아들이니까 이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어머니처럼, 오늘 본문의 이 아버지께서도 그리고 우리 아버님도 이 세 번째 아들, 안가요, 왜 나만 시켜요 라며 끝까지 가지 않은 아들도 다른 두 아들처럼 사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왜냐, 나도 아버지의 아들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님도 완벽하고는 거리가 멀으신 분, 아들인 내 눈으로도 흠집 많고 바보스럽고 부족하기 그지 없으신 분이었지만, 내 아버지 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그리고 보고 싶습니다.
오늘 같은 여름날에는 뒷밭에 가서 오이도 따고 고추도 따고 마늘도 까놓고 장독의 고추장 항아리 열어서 벌건 고추장 한숱갈 떠서 종지에 담아 아버지 좋아하시던 시원한 막걸리 한잔 대접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버님 대접에 술 딸아 드리면서, “이제는 세 번째 물어본 그 아들이 아니라, 첫 번째 물어본 아들도 두 번째 물어본 아들도 아닌, 아버지께서 물으시기 전에 아버지 농장에 가서 일하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데……
2024년 아버님 추도식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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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6-1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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