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패망시킬뻔한 희대의 매국노 유재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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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왜 친일파 청산을 해야하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왜군에 비해 그나마 우세를 보였던건 조선의 수군이였습니다.
그런 조선의 수군을 전몰시켜서 조선을 패망일보직전까지 몰아넣은게 원균이였습니다.
다행히 이순신 장군이 남은 13척의 함선과 패잔병을 추스려
기적이라는 말로도 설명할수없는 명량해전의 승리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할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전쟁때 이번에는 원균보다 더 무능하고 더 무책임하고 더 비열한 자식이 나타납니다.
지휘실패와 무능만으로도 지휘관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일이지만
이놈은 전투중 부대이탈 및 도주를 합니다.
병사들은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투를 할때 지 혼자 살겠다고 비행기 타고 몰래 도망가 버립니다.
결과적으로 지휘관을 잃고 작전지휘를 못받은 예하부대는 중공군에게 학살
보급이 빈약했던 중공군은 학살당한 우리군에서 노획한 물자와 무기로 전투력을 강화하게 됩니다.
북한이나 중공군 그 어떤 부대 수십만영이 공격해도 못해낼 일을 아군의 지휘관이 해낸겁니다.
일개부대가 아닌 당시 수도방위를 책임지던 7사단을 괴멸시키고 수도서울을 함락당한 원흉이자
군단급을 한번도 아닌 두번이나 괴멸시켜 통일을 할수 있었을수도 있던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대한민국을 패망 직전까지 내몰리게한 희대의 역적이자 이적행위자
이런놈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유재흥 전 국방부 장관(사진)이 2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1921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육군 7사단장과 2군단장, 1군사령관, 합참의장(제3대)을 지내고 예비역 중장으로 예편한 뒤 주태국, 주스웨덴, 주이탈리아 대사, 국방부 장관, 대한석유공사 사장, 한국참전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군은 유족과 협의해 고인의 영결식을 29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정승조 합참의장을 장의위원장으로 하는 합참장(合參葬)으로 치르기로 했다. 고인은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유족은 장남 태종 씨(61) 등 2남 3녀가 있다.
기사만 보면 참 대단한 군인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더 대단한 군인이십니다.
어제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라는 책을 읽고 포스팅을 올렸다. 여러 댓글이 올라오던 차에 참으로 흥미 있는 정보를 하나 알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최고의 명장 유재흥이라는 사람의 활약상에 대한 정보였다. 이 양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적이지만 가히 존경할 만한 전과를 올린 사람이다. 7사단 궤멸, 2군단 해체, 3군단 해체, 세계 전쟁사에 그 어떤 장군이 이 정도 업적을 또 남겼는지 궁금하다.
아아, 그런데 관련 포스팅을 자세히 읽다보니 이 양반이 북한군이 아니라 한국군 소속이었단다. 하도 화려한 업적을 남기셔서 그만 북한군 소속으로 착각해버렸다.
전시작전권 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됐을까?
이 양반이 유일하게 전과를 올렸던 시절은 제주 4.3 항쟁 때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올린 '승전'이 유일하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는 7사단 사단장을 맡고 있었는데 경계를 소홀히 하다 북한군에게 기습을 당하고 서울이 뚫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단장으로 진급 2군단을 담당했는데 덕천에서 중국군에게 포위 섬멸 당하고 후퇴를 한다. 이 패배는 청천강까지 진격했던 국군이 결국 1.4 후퇴를 감행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3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3군단은 현리에서 중국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는데, 이때는 물자도 충분하고 인근에 있는 미군의 포격 지원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해볼만한 싸움이었는데 미처 포위가 이루어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전용기를 타고 현장에서 도주, 지휘를 받지 못한 하급장교들과 사병들은 지리멸렬, 병력 60%가 궤멸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덤으로 보급이 부실했던 중국군에게 듬뿍 보급품을 안겨주는 센스까지. 국군3군단은 5월 26일부로 해체되었고 예하9사단은 미10군단에. 3사단은 국군1군단에 배속되었으며 육군본부에 존재했던 전방지휘소가 폐지되었다
밴플리트장군과 유재흥장군의 대화
밴플리트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 : 당신의 예하사단은 어디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 패전을 계기로 진작부터 작전지휘권을 이양받았지만 한국군의 체면을 고려해 직접적으로 행사하지 않던 미군이 한국군의 작전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직접적으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한국전 3년 기간 동안 전세가 뒤집혀 한국군이 몰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마다 유재흥이 있었다. 이 정도 활약상이면 김일성이 공로훈장을 추서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양반은 그후로도 승승장구 무려 국방부 장관에까지 이르게 된다.(1971~1973) 이 당시 북한군 간부들이 남한군을 얼마나 같잖게 생각했을지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욕을 많이 들어서인지 이 양반 명도 길다. 아직까지 살아 있다.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 이런 활동까지 벌였다.
국가안보 0.01% 위험에 대비하는 것
전시작전지휘권 환수가 논란이 되자 전직 국방부장관 출신이랍시고 나와서 작전권환수 절대 불가를 외치며 노무현 탄핵까지 주장했단다. 일단 경계를 소홀히하다 기습을 받고 사단 하나를 말아먹은 사람 입에서 국가안보는 0.01%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라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내 허파를 쉬지않고 움직이게 한다. 군대 가면 지긋지긋하게 듣는 것이 맥아더가 했다는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소리이다. 용서받지 못할 자 주제에 국방부장관까지 오르더니, 우리가 우리 군을 지휘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떠드는 추태를 부린다. 하긴, 지가 생각해도 지같은 놈에게 군대 지휘를 맡기는 건 끔찍하겠지.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장교들이 다들 유재흥하고 같은 수준인지 심히 궁금하다. 정말 그렇다면 작전지휘권 환수는 재앙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별 달고 거들먹거리기만 했다'라고 발언한 것 때문에 예비역 장성들이 발끈했던 일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재흥은 발끈할 자격이 없다. 경계도 못해, 지휘도 못해, 작전도 못해, 대체 한 게 뭘까? 남은 건 그야말로 별 달았다고 거들먹거리기만 한 것 뿐...
유재흥에 대한 기타자료
일본군장교였던 유승렬의 아들로 일본나고야에서 태어나 다섯살 때 조선으로 돌아왔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5기로 졸업하였고 태평양 전쟁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군정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장교가 되었다. 제4여단장. 육군사관학교부교장 등을지냈고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때 민간인 학살을 명령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뒤 정군대상으로 지목되어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지만 5·16 군사정변이 성공한뒤 박정희 독재정권의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타이스웨덴이탈리아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국방부장관 등을 지냈다. 퇴임 후에는 1974년부터 대한석유공사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한국전쟁시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본인지휘하의 1개사단과 2개군단이 패주후 해체되는 결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51년에받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수교훈장등을 여러차례 수여받았다가 무공훈장 수훈이 취소중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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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경북 경산의 하양초등학교에는 유재흥 장군 전승기념비가 있단다. 언제 이겼는지 당최 알 수 없는 장군을 위한 기념비...
이사람이 지휘한 부대중 부대가 괴멸되지 않은 건 딱 한번 제주도에서 비무장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할때 뿐이였습니다.
일본 육사 출신 친일파,
제주 4.3 항쟁때 무고한 민간인을 무려 일만명을 학살한 주역.
국군 제 7사단을 해체시켜버린 장본인.
국군 2군단 해체의 장본인,
1.4 후퇴의 원인제공자,
국군 3군단 해체의 장본인, 군단장이 군단을 버리고 전투중 연락기 타고 도망, 전시 작전권을 미군에 넘긴 장본인
이땅에 정의와 양심이 바로서는날 괭이 들고 가서 파버려야 할 놈입니다.
임진왜란때 왜군에 비해 그나마 우세를 보였던건 조선의 수군이였습니다.
그런 조선의 수군을 전몰시켜서 조선을 패망일보직전까지 몰아넣은게 원균이였습니다.
다행히 이순신 장군이 남은 13척의 함선과 패잔병을 추스려
기적이라는 말로도 설명할수없는 명량해전의 승리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할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전쟁때 이번에는 원균보다 더 무능하고 더 무책임하고 더 비열한 자식이 나타납니다.
지휘실패와 무능만으로도 지휘관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일이지만
이놈은 전투중 부대이탈 및 도주를 합니다.
병사들은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투를 할때 지 혼자 살겠다고 비행기 타고 몰래 도망가 버립니다.
결과적으로 지휘관을 잃고 작전지휘를 못받은 예하부대는 중공군에게 학살
보급이 빈약했던 중공군은 학살당한 우리군에서 노획한 물자와 무기로 전투력을 강화하게 됩니다.
북한이나 중공군 그 어떤 부대 수십만영이 공격해도 못해낼 일을 아군의 지휘관이 해낸겁니다.
일개부대가 아닌 당시 수도방위를 책임지던 7사단을 괴멸시키고 수도서울을 함락당한 원흉이자
군단급을 한번도 아닌 두번이나 괴멸시켜 통일을 할수 있었을수도 있던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대한민국을 패망 직전까지 내몰리게한 희대의 역적이자 이적행위자
이런놈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유재흥 전 국방부 장관(사진)이 2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1921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육군 7사단장과 2군단장, 1군사령관, 합참의장(제3대)을 지내고 예비역 중장으로 예편한 뒤 주태국, 주스웨덴, 주이탈리아 대사, 국방부 장관, 대한석유공사 사장, 한국참전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군은 유족과 협의해 고인의 영결식을 29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정승조 합참의장을 장의위원장으로 하는 합참장(合參葬)으로 치르기로 했다. 고인은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유족은 장남 태종 씨(61) 등 2남 3녀가 있다.
기사만 보면 참 대단한 군인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더 대단한 군인이십니다.
어제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라는 책을 읽고 포스팅을 올렸다. 여러 댓글이 올라오던 차에 참으로 흥미 있는 정보를 하나 알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최고의 명장 유재흥이라는 사람의 활약상에 대한 정보였다. 이 양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적이지만 가히 존경할 만한 전과를 올린 사람이다. 7사단 궤멸, 2군단 해체, 3군단 해체, 세계 전쟁사에 그 어떤 장군이 이 정도 업적을 또 남겼는지 궁금하다.
아아, 그런데 관련 포스팅을 자세히 읽다보니 이 양반이 북한군이 아니라 한국군 소속이었단다. 하도 화려한 업적을 남기셔서 그만 북한군 소속으로 착각해버렸다.
전시작전권 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됐을까?
이 양반이 유일하게 전과를 올렸던 시절은 제주 4.3 항쟁 때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올린 '승전'이 유일하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는 7사단 사단장을 맡고 있었는데 경계를 소홀히 하다 북한군에게 기습을 당하고 서울이 뚫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단장으로 진급 2군단을 담당했는데 덕천에서 중국군에게 포위 섬멸 당하고 후퇴를 한다. 이 패배는 청천강까지 진격했던 국군이 결국 1.4 후퇴를 감행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3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3군단은 현리에서 중국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는데, 이때는 물자도 충분하고 인근에 있는 미군의 포격 지원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해볼만한 싸움이었는데 미처 포위가 이루어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전용기를 타고 현장에서 도주, 지휘를 받지 못한 하급장교들과 사병들은 지리멸렬, 병력 60%가 궤멸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덤으로 보급이 부실했던 중국군에게 듬뿍 보급품을 안겨주는 센스까지. 국군3군단은 5월 26일부로 해체되었고 예하9사단은 미10군단에. 3사단은 국군1군단에 배속되었으며 육군본부에 존재했던 전방지휘소가 폐지되었다
밴플리트장군과 유재흥장군의 대화
밴플리트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 : 당신의 예하사단은 어디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 패전을 계기로 진작부터 작전지휘권을 이양받았지만 한국군의 체면을 고려해 직접적으로 행사하지 않던 미군이 한국군의 작전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직접적으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한국전 3년 기간 동안 전세가 뒤집혀 한국군이 몰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마다 유재흥이 있었다. 이 정도 활약상이면 김일성이 공로훈장을 추서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양반은 그후로도 승승장구 무려 국방부 장관에까지 이르게 된다.(1971~1973) 이 당시 북한군 간부들이 남한군을 얼마나 같잖게 생각했을지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욕을 많이 들어서인지 이 양반 명도 길다. 아직까지 살아 있다.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 이런 활동까지 벌였다.
국가안보 0.01% 위험에 대비하는 것
전시작전지휘권 환수가 논란이 되자 전직 국방부장관 출신이랍시고 나와서 작전권환수 절대 불가를 외치며 노무현 탄핵까지 주장했단다. 일단 경계를 소홀히하다 기습을 받고 사단 하나를 말아먹은 사람 입에서 국가안보는 0.01%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라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내 허파를 쉬지않고 움직이게 한다. 군대 가면 지긋지긋하게 듣는 것이 맥아더가 했다는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소리이다. 용서받지 못할 자 주제에 국방부장관까지 오르더니, 우리가 우리 군을 지휘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떠드는 추태를 부린다. 하긴, 지가 생각해도 지같은 놈에게 군대 지휘를 맡기는 건 끔찍하겠지.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장교들이 다들 유재흥하고 같은 수준인지 심히 궁금하다. 정말 그렇다면 작전지휘권 환수는 재앙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별 달고 거들먹거리기만 했다'라고 발언한 것 때문에 예비역 장성들이 발끈했던 일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재흥은 발끈할 자격이 없다. 경계도 못해, 지휘도 못해, 작전도 못해, 대체 한 게 뭘까? 남은 건 그야말로 별 달았다고 거들먹거리기만 한 것 뿐...
유재흥에 대한 기타자료
일본군장교였던 유승렬의 아들로 일본나고야에서 태어나 다섯살 때 조선으로 돌아왔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5기로 졸업하였고 태평양 전쟁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군정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장교가 되었다. 제4여단장. 육군사관학교부교장 등을지냈고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때 민간인 학살을 명령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뒤 정군대상으로 지목되어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지만 5·16 군사정변이 성공한뒤 박정희 독재정권의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타이스웨덴이탈리아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국방부장관 등을 지냈다. 퇴임 후에는 1974년부터 대한석유공사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한국전쟁시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본인지휘하의 1개사단과 2개군단이 패주후 해체되는 결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51년에받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수교훈장등을 여러차례 수여받았다가 무공훈장 수훈이 취소중에있다
-
ps : 경북 경산의 하양초등학교에는 유재흥 장군 전승기념비가 있단다. 언제 이겼는지 당최 알 수 없는 장군을 위한 기념비...
이사람이 지휘한 부대중 부대가 괴멸되지 않은 건 딱 한번 제주도에서 비무장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할때 뿐이였습니다.
일본 육사 출신 친일파,
제주 4.3 항쟁때 무고한 민간인을 무려 일만명을 학살한 주역.
국군 제 7사단을 해체시켜버린 장본인.
국군 2군단 해체의 장본인,
1.4 후퇴의 원인제공자,
국군 3군단 해체의 장본인, 군단장이 군단을 버리고 전투중 연락기 타고 도망, 전시 작전권을 미군에 넘긴 장본인
이땅에 정의와 양심이 바로서는날 괭이 들고 가서 파버려야 할 놈입니다.
추천 13
작성일2024-12-16 20:06
슬기로운사생활님의 댓글
슬기로운사생활
부관참시
라는 단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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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단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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