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고, 능력없고, 배경없는 사람일수록 인문고전을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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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에서 강의하는 것을 보고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라는 책을 구입하였다.
인문학이 실종되었다고 하는 지금에 이지성의 인문학에 대한 강의는 그의 책을 구입하는데 아무 주저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리딩으로 리드하라"라는 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현재를 살면서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이 왜 나와는 다른가? 왜 우리와는 다른가? 라는 이유에서부터 의문을 갖고 출발한 책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들과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라는 호기심은 나도 갖고 있다. 단지 별로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역사속의 위인들의 삶과 나의 삶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역사속의 그들은 이미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은 위인전에 갇혀있다고 단언을 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지성이 발견한 그들은 역사책이나 위인전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서 생생하게 그들의 정신을 내뿜고 있다. 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의 호흡에 맞춰서 책을 읽어 나가게 되었다.
죽은 화석으로 놓아두고 바라보던 나의 느낌속에도 역사속의 그들이 점차로 살아나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세종대왕, 서경덕, 이이, 이황, 박제가, 정약용, 김정희, 사마천, 공자, 맹자, 노자, 당 태종,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 대왕, 데카르트, 퀴리부인.....등등 이름만 대면 모두 알 수 있는 그 많은 위인들이 박제된 화석에서 깨어나서 나의 정신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과 교감한다는 것, 그들의 정신과 접속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어떤 느낌일까? 에 대한 것을 전달해주기 위해 이지성은 그의 책속에서 강한 호흡을 품어내고 있었다. 때때로 격앙되고 감정이 고조되고, 스스로 벅찬 감정을 한 호흡 한 호흡 다듬으려 애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지성이 역사속의 위인들과 현재 세상을 끌고 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의 모든 공통점은 인문고전독서의 위대함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독서광이었다. 그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인문고전 독서를 죽어라고 했다. 그들의 모든 영감의 원천은 인문고전 독서였다.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경영하고 자본주의를 경영하는 그들은 모두 인문고전독서의 힘을 빌었다. 그리고 사고하는 두뇌를 만들었고, 평범한 두뇌를 철학하는 두뇌로 개조했다.
'전세계의 부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 세계 부의 90%이상은 세계 인구의 약 0.1%가 소유했다.'
"과거의 부자인 왕과 귀족들은 신분제도를 만들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부자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현대의 부자들은 교육제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계로 집입하는 것을 막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사립학교와 공립학교다. 과거의 부자와 현대의 부자들은 공통점이 있다. 인문고전 독서가라는 사실이다."
"현대의 자본주의의 틀을 만든 사람들이 모두 인문고전 독서로 단련된 천재 경제학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투자자들의 삶을 조사해보면 독서광이고, 최고수준의 인문고전 독서가다. 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사실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에 왜 세계적인 투자자가 없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 투자자들은 그들만큼 인문고전을 읽지 않는다. 물론 투자기법이나 매매기법을 다룬 책들은 다들 열심히 읽는다. 하지만 그것은 독서라기보다는 재테크공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독서는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주지 못한다. 세계적인 수준의 관점에서 보면 고작해야 푼돈을 버는 기술이나 가르쳐줄 뿐이다.
"군중과 다르게 투자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유의 이야기는 매우 식상하다. 그런데 왜 군중은 정작 투자시장에 들어가면 자신이 아는 바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일까? 그 결과 그나마 모아둔 돈마저 합법적으로 털리고 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인문고전독서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익이나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투자 철학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가 있어야 한다. 철학하는 세포는 오직 철학고전 독서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군중은 재테크 서적은 읽어도 철학고전은 읽지 않는다. 즉 군중의 두뇌에는 철학하는 세포가 없다.
그 결과 투자시장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그동안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은 '시장과 다르게 사고하라'는 말을 순식간에 망각하고 자신의 재산을 '철학하는 세포'를 가진 세계적인 투자자들에게 고스란히 바치고 마는 것이다."
"만일 누구라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이 애독한 책을 읽어서 그들 같은 사고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베스트셀러 자기개발 서적은 독자에게 불같은 열정과 폭풍 같은 도전을 던져준다. 베스트셀러 소설은 독자의 마음을 고양하고 감동의 물결에 젖게 한다. 베스트셀러 인문교양서적은 독자가 지적 만족감과 지적 쾌감을 느끼게 한다. 베스트셀러 재테크 서적은 돈을 버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서양의 천재 경제학자들이 만든 우리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아름답게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문고전을 열심히 읽기만 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지혜는 책속에 있지 않다. 지혜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
세상에는 소위 인문고전마니아라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어떤 교수들은 평생 인문고전만 파고든다. 하지만 그들의 독서는 세상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인문고전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인문고전을 통해 내면의 지혜를 일깨우는 대신 말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같은 교수들이나 존 템플턴, 피터 린치 같은 투자자들은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내면의 지혜를 일깨운 사람들이다. 치열한 철학고전 독서를 통해 두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를 만든 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과 월스트리트 금융시스템의 본질을 꿰뚫은 사람들이다."
"인문고전 독서에는 두뇌를 변화시키는 힘이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자신할 수 있다. 만일 누구든지 인문고전, 특히 철학고전을 단 한 권이라도 제대로 뗀다면 그 사람의 두뇌는 반드시 변화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 꾸준히 인문고전 독서를 해나간다면 언젠가는 두뇌가 혁명적으로 변화한다. 이는 역사 속의 천재들이 증명한 것이다. 정치,경제,경영,문학,수학,과학,미술,음악,건축 등 각 분야의 대표적인 천재치고 인문고전에 깊이 빠지지 않았던 사람은 없다. 이는 곧 무엇을 뜻하는가? 누구든지 자신의 두뇌를 지금보다 몇 단계 높은 차원으로 도약시키고자 한다면, 나아가 천재의 영역에까지 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고전은 짧게는 100~200년, 길게는 1000~2000년 이상 된 지혜의 산삼이다. 이런 지혜의 산삼을 지속적으로 섭취한 두뇌가 어떻게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어렵기만 했던 아니 차라리 고문처럼 느껴졌던 인문고전이 어느 순간 기막히게 재미있어지기 시작하고, 두뇌 속에 그 재미를 맛보는 순간이 서서히 쌓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계속 해 나가다 보면 마치 벼락처럼 두뇌가 충격적으로 바뀌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4차원적인 경험이므로. 0.1초 아니 0.001초일까. 그 초순간적인 경험을 하고 나면 두뇌는 완벽하게 변화한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하듯이. 그 환상적인 경험을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하게 되기를 간정히 소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와 경영은 더 중요해졌다. 현재의 미국의 경제학은 모두 인문고전독서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모든 모티브의 원천은 인문고전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스스로 철학하는 세포를 갖고 있고, 그 기반위에서 근대 현대의 경제학이 모두 세워졌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인문고전 독서를 통하여 자신의 두뇌를 변화시켜서 철학하는 사고를 갖게 되어 천재가 되었다. 그럼으로 인해서 경제학의 근본도 철학이 바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철학을 하지 않는 나라들과 사람들이 무슨 수로 그들을 따라잡아 앞서가겠는가...?
모든 분야의 최고가 된 사람들, 천재들은 각 분야가 달라도 그 바탕엔 인문고전 독서가 있었다. 그들의 영감의 원천은 인문고전 독서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통하여 그들이 스스로 철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안목이 달라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 각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그 시대에서 인문고전 독서를 하여 자신들의 현재와 잘 만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시대를 사는 우리도 우리시대와 인문고전이 만나는 독서를 통하여 우리시대에 걸맞는 철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경제학의 천재들이 만들어낸 제도들도 현대에 와서는 많은 모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그 시대를 사는 천재들이 그 시대를 보고 진단하여 만든 해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시대에 맞는 진단과 해법으로 모순된 제도들을 수정하여야 한다. 우리시대와 만나는 인문고전 독서는 한층 더 발전되고 아름다운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인문고전 독서의 방식은...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맹수처럼 덤벼들고,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고, 연애편지를 쓰듯 필사하고, 통할 때 까지 사색하고, 그리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라. 이다.
이 중에서 인문고전 독서의 방법을 요약해보면, 반복독서, 필사, 사색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반복 독서는 내가 조금 약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본다는 것은 나에게는 정말 지겨운 일이다. 그러나 더 생각해보니 때에 따라서는 지겨워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7년 전 쯤에 일이다. 그때는 불교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대승불교 혹은 선불교에 대해서 대략적으로만 간만 보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을 때 였고, 솔직히 불교가 절에 가거나 예불을 보는 것이 전부이고, 간간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불경을 접하고, 달라이라마의 책들을 읽는 정도로만 이해를 하고 있었다. 불교가 막연하게 느껴졌고 불교의 정수인 부처님 말씀이 무엇인지 잘 몰랐었다. 또한 지나고 생각해보니 불교에 대해서 나의 의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때 였고, 그만큼 불교에 대해서는 머릿속이 비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즉 무엇인가를 채우기 좋은 상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불교에 대해서 비어있던 머리는 초기불경(쌍윳따니까야)으로 채울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들을 보충자료로 활용했다. 그러나 처음에 읽을 때 어떤 감동은 전해지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잘 알 수가 없었다. 한 줄 읽고 책을 가슴에 올려놓고 계속 생각했다. 차라리 연기나, 무아, 무상, 오온 등등의 말들을 가지고 묵상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그것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사색했다. 알 때까지, 마음속에서 어떤 앎의 대한 깨달음이 전해질 때까지...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그만큼 음미하고 사색하는 것이 쌍윳따니까야를 읽으면서는 좋았다. 어떤 만족감과 행복감이 늘 생겨났었다. 그리고 그 책 한 권을 그런 식으로 읽으니 6개월이 걸렸고, 마지막 단락은 그 뒤로 무슨 일 때문인지 못 읽고 있다가 2~3개월쯤 뒤에 읽어서 대략 한 10개월 만에 그 책을 다 읽은 것 같다. 그러나 더 정확히는 그 책을 이해하는데 3년 정도 소요된 것 같다. 그 뒤로도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그 책을 살펴보면서 이해를 해 나가게 되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경에 대해서 부처님 말씀에 대해서는 그 책 한 권을 통해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러다보니 불경의 방대함에 질리게 된다. 그래서 방대한 양을 소화시키지는 못해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해서 다른 책들과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하는 일들은 모두 이 책 한 권을 소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여 자랑할 것도 못되지 싶다. 다만 그동안은 나의 독서 방식에 대해서 옳은 방식인지 잘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잘못된 방식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라는 책을 통해서 조금은 확인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제대로 된 철학 서적들을 접하게 된 것은 두 방향의 부류이고, 책으로 따진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초기불경(쌍윳따니까야)이고, 김동렬의 구조론이다. 이 두 편의 서적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반복과 필사와 사색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다보니 내 스스로의 깨달음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두 책을 읽는 동안 기쁨과 희열이 늘 같이 했다. 뭔가를 벗어난다는 것, 뭔가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는 다는 것을 이 두 권의 책은 충실하게 전달해주었다. 그리고 이 두 권의 책은 내가 다른 책들, 다른 철학서들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초기불경이 부처님의 정신을 통해서 진리에 접속하는 체험이라는 것을 알게 하였다면, 구조론은 집단지성과 접속하는 방법을 알게 하였고, 공동체 속에서 개인인 나의 위치를 자각하게 하였다. 세상이 어떻게 진리 속에서 함께하게 되었는가와, 거기에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진리의 체계와 인간의 위치에 대한 자각은, 인간의 내면에 왜 지혜가 존재하는가와 그 지혜를 운용함에 있어서 지식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게 하였다.
이지성이 제안한 인문고전 독서의 목록을 보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일천한 독서를 해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너무나 부족하다는 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앞으로 나의 정신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고, 한편으로는 어떤 배신감도 느낀다. 진즉 깨달았더라면 하는 후회도 든다. 일종의 또 한번의 자극을 받고 지혜의 화살을 맞을 준비를 하게된 셈이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서 어떤 벅참과 고마운 마음이 드니... 저자 이지성의 말을 빌리자면 " 나는 돈이 사람의 행복을 위해 발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슬프게도 돈은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역할을 더 많이 해온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에 돈을 섬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인문고전은 비록 현대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인문고전 저자들은 하나같이 돈은 사람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여기서 현대의 자본주의의 희망을 보았다. 자본주의는 결국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문고전 저자들의 믿음에 걸 맞는 형태로 진화할 것이다." >라는 말을 빌려 본다.
또한 김동렬의 구조론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자본주의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가꾸는 방법이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는 시스템이지만, 사회주의는 시스템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보완재이며 또한 그 시스템을 다루는 인간의 역량이다.
자본주의 -자연법칙에서 유래- 시장영역에 제한됨 - 자본주의는 시스템이므로 - 수단(도구)
사회주의 - 인간의 이념적 가치 - 정치, 경제. 시장,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침, 좀 더 차원 높은 가치임 - 사회주의는 이념이므로 - 목적
(사회주의 = 공산주의라고 생각하면 안 됨,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두뇌가 열리지 않는 것이고 바보가 되는 것임.)
자본주의 시스템은 통제의 대상이지 섬김의 대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을 통제할 수 있는가이다. 자본주의는 정밀한 기계장치와 같다. 기계장치는 숙련된 기능공이 필요하다. 그래서 전문가의 손에 맡겨야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전문가의 부재에 따른 것이다.
지금 인류는 고장난 자본주의를 잘 수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저절로 수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맹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 가치로 자본주의를 통제해야 한다. 전문가들 역시 사회주의라는 검증장치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사람이다. 해답은 인간이 쥐고 있다. 시스템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므로 시스템이 모든 문제를 해결 할 것이라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자본주의 그 자체가 시스템적인 보수성을 가져서 진보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발달한 것은 순전히 인간의 의도적인 노력 덕분이다.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임의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에 있는 것을 사회로 이식한 것이다. 그것이 진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정치적으로 중립이다. 자본주의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인간이 잘 운영하면 선이고, 잘못 운영하면 악이다. 도구에 불과한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도구의 주인인 인간의 경제하는 역량의 문제다.
언제나 1로 2를 통제한다. 모든 자연현상은 잉여의 원리를 따른다. 잉여를 통제가능한 시스템에 가두면 자본주의 성공이다. 잉여의 통제에 실패하면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힘 조절에 성공해야 한다. 인간이 이 능력을 기르는데 사회적인 가치가 소용된다. 현대문명의 위기는 긴장은 있는데 이완은 없다. 경쟁은 있지만 마음을 허락할 줄 모른다.(그러나 이완은 반드시 긴장을 해야만 이완을 경험하게 된다. 긴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또한 쌍윳따니까야의 대목을 빌려보면...세계를 조건으로 지각이 생겨나고, 견해가 생겨나고, 사념이 생겨난다. 올바로 깨달은 자가 아니면서도 올바로 깨달은 자라고 하는 견해는 무엇을 조건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은 무명의 세계다.
저열한 세계를 조건으로 저열한 사념, 저열한 의도, 저열한 소망, 저열한 욕구, 저열한 인격, 저열한 언어가 생겨난다. 그는 저열한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수립하고 드러내고 분별하고 설명한다. 그의 출생은 저열하다고 나는 말한다.
어중간한 세계를 조건으로 어중간한 사념, 어중간한 의도, 어중간한 소망, 어중간한 욕구, 어중간한 인격, 어중간한 언어가 생겨난다. 그는 어중간한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수립하고 분별하고 설명한다. 그의 출생은 어중간하다고 나는 말한다.
탁월한 세계를 조건으로 탁월한 사념, 탁월한 의도, 탁월한 소망, 탁월한 욕구, 탁월한 인격, 탁월한 언어가 생겨난다. 그는 탁월한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수립하고 드러내고 분별하고 설명한다. 그의 출생은 탁월하다고 나는 말한다.
이러한 말들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되는지, 그리고 그동안의 지식을 쌓는 과정 중에서 무엇이 빠져 있었는지를 알게 한다.
그리고 저자 이지성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생기지 않았을 때 인문고전 철학서들의 해설서를 보기를 경계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사고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는 맹목적이 되거나 휩쓸리거나 그 해설서의 생각에 동참해버리게 되어 자기의 주관적인 견해가 없어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습관화되면 자기 사유를 할 수 없어서 자기 의견이 없어진다. 이는 독서의 폐해가 된다. 즉 철학을 하는 세포를 갖거나 두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 독서의 수준을 쌓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가졌을 때 해설서를 본다면 치우치거나 맹목적이 되지 않고 자기 견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독서를 하면서 해설서에 의존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공부하다가 참고서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참고서를 보고 공부하면 남는 것이 없으므로....
이렇게 저자 이지성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18년의 인문고전 독서 기간과 3년이란 준비 기간을 걸쳐 완성한 책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나의 경험과 더불어서 생각해 보았다. 이지성은 아마도 종교가 기독교 인것 같다. 그래서 그 자신도 종교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 다만 나의 경험은 초기불경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고, 나 역시 초기불경을 믿어야 한다는 신념이 아닌 지혜를 탐구하는 마음으로 접근하였고, 인문고전 독서의 경험과 다를 것이 없다고 판단되어져서 같이 써 본 것이니 오해 없으시기를 바란다. 종교를 떠나서 같이 공유하고 추구해야 하는 인문고전 독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기에 리뷰를 쓰게 되었다.
인문고전 독서의 대한 가이드와 방향제시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 역시 누군가들에게 혹은 나의 후배들에게 이런 글을 남겨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리뷰를 썼다. 인문고전 독서의 중요성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실천이 안 되고 있을 뿐이고, 살면서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랴..그리 큰 욕심 없는데 책은 많이 읽어서 뭐 하겠어..등등 많은 생각들이 있겠지만,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정신의 중요함을 추구한다면 인문고전 독서는 반드시 돈을 많이 벌지 못하여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그러나 그 교육의 방향이 가치를 알지 못하고 죽은 교육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가치를 알게 하고 그것들의 안목을 키워주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읽어야 할 책들을 잘 선별해서 읽어야 하겠지만, 부담은 백배지만, 그만큼 기쁨도 클 것이므로 한권씩 차근차근 도전해 보아야겠다. 또한 반복 독서를 싫어하는 버릇도 조금은 고쳐보아야겠다. 이해도에 비해서 암기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이다. 외우는 것을 싫어하여서가 아니라 반복 독서의 묘미를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선학들이 반복 독서를 한 이유는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반복 독서가 단지 서적이 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인문학이 실종되었다고 하는 지금에 이지성의 인문학에 대한 강의는 그의 책을 구입하는데 아무 주저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리딩으로 리드하라"라는 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현재를 살면서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이 왜 나와는 다른가? 왜 우리와는 다른가? 라는 이유에서부터 의문을 갖고 출발한 책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들과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라는 호기심은 나도 갖고 있다. 단지 별로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역사속의 위인들의 삶과 나의 삶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역사속의 그들은 이미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은 위인전에 갇혀있다고 단언을 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지성이 발견한 그들은 역사책이나 위인전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서 생생하게 그들의 정신을 내뿜고 있다. 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의 호흡에 맞춰서 책을 읽어 나가게 되었다.
죽은 화석으로 놓아두고 바라보던 나의 느낌속에도 역사속의 그들이 점차로 살아나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세종대왕, 서경덕, 이이, 이황, 박제가, 정약용, 김정희, 사마천, 공자, 맹자, 노자, 당 태종,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 대왕, 데카르트, 퀴리부인.....등등 이름만 대면 모두 알 수 있는 그 많은 위인들이 박제된 화석에서 깨어나서 나의 정신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과 교감한다는 것, 그들의 정신과 접속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어떤 느낌일까? 에 대한 것을 전달해주기 위해 이지성은 그의 책속에서 강한 호흡을 품어내고 있었다. 때때로 격앙되고 감정이 고조되고, 스스로 벅찬 감정을 한 호흡 한 호흡 다듬으려 애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지성이 역사속의 위인들과 현재 세상을 끌고 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의 모든 공통점은 인문고전독서의 위대함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독서광이었다. 그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인문고전 독서를 죽어라고 했다. 그들의 모든 영감의 원천은 인문고전 독서였다.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경영하고 자본주의를 경영하는 그들은 모두 인문고전독서의 힘을 빌었다. 그리고 사고하는 두뇌를 만들었고, 평범한 두뇌를 철학하는 두뇌로 개조했다.
'전세계의 부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 세계 부의 90%이상은 세계 인구의 약 0.1%가 소유했다.'
"과거의 부자인 왕과 귀족들은 신분제도를 만들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부자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현대의 부자들은 교육제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계로 집입하는 것을 막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사립학교와 공립학교다. 과거의 부자와 현대의 부자들은 공통점이 있다. 인문고전 독서가라는 사실이다."
"현대의 자본주의의 틀을 만든 사람들이 모두 인문고전 독서로 단련된 천재 경제학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투자자들의 삶을 조사해보면 독서광이고, 최고수준의 인문고전 독서가다. 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사실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에 왜 세계적인 투자자가 없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 투자자들은 그들만큼 인문고전을 읽지 않는다. 물론 투자기법이나 매매기법을 다룬 책들은 다들 열심히 읽는다. 하지만 그것은 독서라기보다는 재테크공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독서는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주지 못한다. 세계적인 수준의 관점에서 보면 고작해야 푼돈을 버는 기술이나 가르쳐줄 뿐이다.
"군중과 다르게 투자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유의 이야기는 매우 식상하다. 그런데 왜 군중은 정작 투자시장에 들어가면 자신이 아는 바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일까? 그 결과 그나마 모아둔 돈마저 합법적으로 털리고 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인문고전독서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익이나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투자 철학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가 있어야 한다. 철학하는 세포는 오직 철학고전 독서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군중은 재테크 서적은 읽어도 철학고전은 읽지 않는다. 즉 군중의 두뇌에는 철학하는 세포가 없다.
그 결과 투자시장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그동안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은 '시장과 다르게 사고하라'는 말을 순식간에 망각하고 자신의 재산을 '철학하는 세포'를 가진 세계적인 투자자들에게 고스란히 바치고 마는 것이다."
"만일 누구라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이 애독한 책을 읽어서 그들 같은 사고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베스트셀러 자기개발 서적은 독자에게 불같은 열정과 폭풍 같은 도전을 던져준다. 베스트셀러 소설은 독자의 마음을 고양하고 감동의 물결에 젖게 한다. 베스트셀러 인문교양서적은 독자가 지적 만족감과 지적 쾌감을 느끼게 한다. 베스트셀러 재테크 서적은 돈을 버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서양의 천재 경제학자들이 만든 우리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아름답게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문고전을 열심히 읽기만 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지혜는 책속에 있지 않다. 지혜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
세상에는 소위 인문고전마니아라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어떤 교수들은 평생 인문고전만 파고든다. 하지만 그들의 독서는 세상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인문고전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인문고전을 통해 내면의 지혜를 일깨우는 대신 말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같은 교수들이나 존 템플턴, 피터 린치 같은 투자자들은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내면의 지혜를 일깨운 사람들이다. 치열한 철학고전 독서를 통해 두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를 만든 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과 월스트리트 금융시스템의 본질을 꿰뚫은 사람들이다."
"인문고전 독서에는 두뇌를 변화시키는 힘이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자신할 수 있다. 만일 누구든지 인문고전, 특히 철학고전을 단 한 권이라도 제대로 뗀다면 그 사람의 두뇌는 반드시 변화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 꾸준히 인문고전 독서를 해나간다면 언젠가는 두뇌가 혁명적으로 변화한다. 이는 역사 속의 천재들이 증명한 것이다. 정치,경제,경영,문학,수학,과학,미술,음악,건축 등 각 분야의 대표적인 천재치고 인문고전에 깊이 빠지지 않았던 사람은 없다. 이는 곧 무엇을 뜻하는가? 누구든지 자신의 두뇌를 지금보다 몇 단계 높은 차원으로 도약시키고자 한다면, 나아가 천재의 영역에까지 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고전은 짧게는 100~200년, 길게는 1000~2000년 이상 된 지혜의 산삼이다. 이런 지혜의 산삼을 지속적으로 섭취한 두뇌가 어떻게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어렵기만 했던 아니 차라리 고문처럼 느껴졌던 인문고전이 어느 순간 기막히게 재미있어지기 시작하고, 두뇌 속에 그 재미를 맛보는 순간이 서서히 쌓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계속 해 나가다 보면 마치 벼락처럼 두뇌가 충격적으로 바뀌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4차원적인 경험이므로. 0.1초 아니 0.001초일까. 그 초순간적인 경험을 하고 나면 두뇌는 완벽하게 변화한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하듯이. 그 환상적인 경험을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하게 되기를 간정히 소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와 경영은 더 중요해졌다. 현재의 미국의 경제학은 모두 인문고전독서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모든 모티브의 원천은 인문고전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스스로 철학하는 세포를 갖고 있고, 그 기반위에서 근대 현대의 경제학이 모두 세워졌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인문고전 독서를 통하여 자신의 두뇌를 변화시켜서 철학하는 사고를 갖게 되어 천재가 되었다. 그럼으로 인해서 경제학의 근본도 철학이 바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철학을 하지 않는 나라들과 사람들이 무슨 수로 그들을 따라잡아 앞서가겠는가...?
모든 분야의 최고가 된 사람들, 천재들은 각 분야가 달라도 그 바탕엔 인문고전 독서가 있었다. 그들의 영감의 원천은 인문고전 독서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통하여 그들이 스스로 철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안목이 달라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 각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그 시대에서 인문고전 독서를 하여 자신들의 현재와 잘 만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시대를 사는 우리도 우리시대와 인문고전이 만나는 독서를 통하여 우리시대에 걸맞는 철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경제학의 천재들이 만들어낸 제도들도 현대에 와서는 많은 모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그 시대를 사는 천재들이 그 시대를 보고 진단하여 만든 해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시대에 맞는 진단과 해법으로 모순된 제도들을 수정하여야 한다. 우리시대와 만나는 인문고전 독서는 한층 더 발전되고 아름다운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인문고전 독서의 방식은...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맹수처럼 덤벼들고,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고, 연애편지를 쓰듯 필사하고, 통할 때 까지 사색하고, 그리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라. 이다.
이 중에서 인문고전 독서의 방법을 요약해보면, 반복독서, 필사, 사색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반복 독서는 내가 조금 약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본다는 것은 나에게는 정말 지겨운 일이다. 그러나 더 생각해보니 때에 따라서는 지겨워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7년 전 쯤에 일이다. 그때는 불교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대승불교 혹은 선불교에 대해서 대략적으로만 간만 보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을 때 였고, 솔직히 불교가 절에 가거나 예불을 보는 것이 전부이고, 간간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불경을 접하고, 달라이라마의 책들을 읽는 정도로만 이해를 하고 있었다. 불교가 막연하게 느껴졌고 불교의 정수인 부처님 말씀이 무엇인지 잘 몰랐었다. 또한 지나고 생각해보니 불교에 대해서 나의 의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때 였고, 그만큼 불교에 대해서는 머릿속이 비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즉 무엇인가를 채우기 좋은 상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불교에 대해서 비어있던 머리는 초기불경(쌍윳따니까야)으로 채울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들을 보충자료로 활용했다. 그러나 처음에 읽을 때 어떤 감동은 전해지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잘 알 수가 없었다. 한 줄 읽고 책을 가슴에 올려놓고 계속 생각했다. 차라리 연기나, 무아, 무상, 오온 등등의 말들을 가지고 묵상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그것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사색했다. 알 때까지, 마음속에서 어떤 앎의 대한 깨달음이 전해질 때까지...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그만큼 음미하고 사색하는 것이 쌍윳따니까야를 읽으면서는 좋았다. 어떤 만족감과 행복감이 늘 생겨났었다. 그리고 그 책 한 권을 그런 식으로 읽으니 6개월이 걸렸고, 마지막 단락은 그 뒤로 무슨 일 때문인지 못 읽고 있다가 2~3개월쯤 뒤에 읽어서 대략 한 10개월 만에 그 책을 다 읽은 것 같다. 그러나 더 정확히는 그 책을 이해하는데 3년 정도 소요된 것 같다. 그 뒤로도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그 책을 살펴보면서 이해를 해 나가게 되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경에 대해서 부처님 말씀에 대해서는 그 책 한 권을 통해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러다보니 불경의 방대함에 질리게 된다. 그래서 방대한 양을 소화시키지는 못해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해서 다른 책들과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하는 일들은 모두 이 책 한 권을 소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여 자랑할 것도 못되지 싶다. 다만 그동안은 나의 독서 방식에 대해서 옳은 방식인지 잘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잘못된 방식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라는 책을 통해서 조금은 확인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제대로 된 철학 서적들을 접하게 된 것은 두 방향의 부류이고, 책으로 따진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초기불경(쌍윳따니까야)이고, 김동렬의 구조론이다. 이 두 편의 서적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반복과 필사와 사색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다보니 내 스스로의 깨달음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두 책을 읽는 동안 기쁨과 희열이 늘 같이 했다. 뭔가를 벗어난다는 것, 뭔가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는 다는 것을 이 두 권의 책은 충실하게 전달해주었다. 그리고 이 두 권의 책은 내가 다른 책들, 다른 철학서들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초기불경이 부처님의 정신을 통해서 진리에 접속하는 체험이라는 것을 알게 하였다면, 구조론은 집단지성과 접속하는 방법을 알게 하였고, 공동체 속에서 개인인 나의 위치를 자각하게 하였다. 세상이 어떻게 진리 속에서 함께하게 되었는가와, 거기에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진리의 체계와 인간의 위치에 대한 자각은, 인간의 내면에 왜 지혜가 존재하는가와 그 지혜를 운용함에 있어서 지식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게 하였다.
이지성이 제안한 인문고전 독서의 목록을 보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일천한 독서를 해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너무나 부족하다는 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앞으로 나의 정신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고, 한편으로는 어떤 배신감도 느낀다. 진즉 깨달았더라면 하는 후회도 든다. 일종의 또 한번의 자극을 받고 지혜의 화살을 맞을 준비를 하게된 셈이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서 어떤 벅참과 고마운 마음이 드니... 저자 이지성의 말을 빌리자면 " 나는 돈이 사람의 행복을 위해 발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슬프게도 돈은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역할을 더 많이 해온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에 돈을 섬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인문고전은 비록 현대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인문고전 저자들은 하나같이 돈은 사람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여기서 현대의 자본주의의 희망을 보았다. 자본주의는 결국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문고전 저자들의 믿음에 걸 맞는 형태로 진화할 것이다." >라는 말을 빌려 본다.
또한 김동렬의 구조론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자본주의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가꾸는 방법이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는 시스템이지만, 사회주의는 시스템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보완재이며 또한 그 시스템을 다루는 인간의 역량이다.
자본주의 -자연법칙에서 유래- 시장영역에 제한됨 - 자본주의는 시스템이므로 - 수단(도구)
사회주의 - 인간의 이념적 가치 - 정치, 경제. 시장,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침, 좀 더 차원 높은 가치임 - 사회주의는 이념이므로 - 목적
(사회주의 = 공산주의라고 생각하면 안 됨,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두뇌가 열리지 않는 것이고 바보가 되는 것임.)
자본주의 시스템은 통제의 대상이지 섬김의 대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을 통제할 수 있는가이다. 자본주의는 정밀한 기계장치와 같다. 기계장치는 숙련된 기능공이 필요하다. 그래서 전문가의 손에 맡겨야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전문가의 부재에 따른 것이다.
지금 인류는 고장난 자본주의를 잘 수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저절로 수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맹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 가치로 자본주의를 통제해야 한다. 전문가들 역시 사회주의라는 검증장치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사람이다. 해답은 인간이 쥐고 있다. 시스템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므로 시스템이 모든 문제를 해결 할 것이라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자본주의 그 자체가 시스템적인 보수성을 가져서 진보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발달한 것은 순전히 인간의 의도적인 노력 덕분이다.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임의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에 있는 것을 사회로 이식한 것이다. 그것이 진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정치적으로 중립이다. 자본주의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인간이 잘 운영하면 선이고, 잘못 운영하면 악이다. 도구에 불과한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도구의 주인인 인간의 경제하는 역량의 문제다.
언제나 1로 2를 통제한다. 모든 자연현상은 잉여의 원리를 따른다. 잉여를 통제가능한 시스템에 가두면 자본주의 성공이다. 잉여의 통제에 실패하면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힘 조절에 성공해야 한다. 인간이 이 능력을 기르는데 사회적인 가치가 소용된다. 현대문명의 위기는 긴장은 있는데 이완은 없다. 경쟁은 있지만 마음을 허락할 줄 모른다.(그러나 이완은 반드시 긴장을 해야만 이완을 경험하게 된다. 긴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또한 쌍윳따니까야의 대목을 빌려보면...세계를 조건으로 지각이 생겨나고, 견해가 생겨나고, 사념이 생겨난다. 올바로 깨달은 자가 아니면서도 올바로 깨달은 자라고 하는 견해는 무엇을 조건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은 무명의 세계다.
저열한 세계를 조건으로 저열한 사념, 저열한 의도, 저열한 소망, 저열한 욕구, 저열한 인격, 저열한 언어가 생겨난다. 그는 저열한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수립하고 드러내고 분별하고 설명한다. 그의 출생은 저열하다고 나는 말한다.
어중간한 세계를 조건으로 어중간한 사념, 어중간한 의도, 어중간한 소망, 어중간한 욕구, 어중간한 인격, 어중간한 언어가 생겨난다. 그는 어중간한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수립하고 분별하고 설명한다. 그의 출생은 어중간하다고 나는 말한다.
탁월한 세계를 조건으로 탁월한 사념, 탁월한 의도, 탁월한 소망, 탁월한 욕구, 탁월한 인격, 탁월한 언어가 생겨난다. 그는 탁월한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수립하고 드러내고 분별하고 설명한다. 그의 출생은 탁월하다고 나는 말한다.
이러한 말들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되는지, 그리고 그동안의 지식을 쌓는 과정 중에서 무엇이 빠져 있었는지를 알게 한다.
그리고 저자 이지성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생기지 않았을 때 인문고전 철학서들의 해설서를 보기를 경계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사고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는 맹목적이 되거나 휩쓸리거나 그 해설서의 생각에 동참해버리게 되어 자기의 주관적인 견해가 없어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습관화되면 자기 사유를 할 수 없어서 자기 의견이 없어진다. 이는 독서의 폐해가 된다. 즉 철학을 하는 세포를 갖거나 두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 독서의 수준을 쌓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가졌을 때 해설서를 본다면 치우치거나 맹목적이 되지 않고 자기 견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독서를 하면서 해설서에 의존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공부하다가 참고서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참고서를 보고 공부하면 남는 것이 없으므로....
이렇게 저자 이지성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18년의 인문고전 독서 기간과 3년이란 준비 기간을 걸쳐 완성한 책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나의 경험과 더불어서 생각해 보았다. 이지성은 아마도 종교가 기독교 인것 같다. 그래서 그 자신도 종교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 다만 나의 경험은 초기불경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고, 나 역시 초기불경을 믿어야 한다는 신념이 아닌 지혜를 탐구하는 마음으로 접근하였고, 인문고전 독서의 경험과 다를 것이 없다고 판단되어져서 같이 써 본 것이니 오해 없으시기를 바란다. 종교를 떠나서 같이 공유하고 추구해야 하는 인문고전 독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기에 리뷰를 쓰게 되었다.
인문고전 독서의 대한 가이드와 방향제시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 역시 누군가들에게 혹은 나의 후배들에게 이런 글을 남겨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리뷰를 썼다. 인문고전 독서의 중요성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실천이 안 되고 있을 뿐이고, 살면서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랴..그리 큰 욕심 없는데 책은 많이 읽어서 뭐 하겠어..등등 많은 생각들이 있겠지만,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정신의 중요함을 추구한다면 인문고전 독서는 반드시 돈을 많이 벌지 못하여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그러나 그 교육의 방향이 가치를 알지 못하고 죽은 교육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가치를 알게 하고 그것들의 안목을 키워주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읽어야 할 책들을 잘 선별해서 읽어야 하겠지만, 부담은 백배지만, 그만큼 기쁨도 클 것이므로 한권씩 차근차근 도전해 보아야겠다. 또한 반복 독서를 싫어하는 버릇도 조금은 고쳐보아야겠다. 이해도에 비해서 암기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이다. 외우는 것을 싫어하여서가 아니라 반복 독서의 묘미를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선학들이 반복 독서를 한 이유는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반복 독서가 단지 서적이 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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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12-2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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