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심정 /김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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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난 5월 27일 별세하신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 상임공동대표 김태길 선생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겉멋과 속멋」(김태길 지음, 철학과 현실사, 2005)에서 옮겼습니다.
작금의 심정 /김태길
대한민국 학술원이라는 고령집단에 깊이 관여한 까닭으로, 팔순이 넘는 나이임에도 근래 문상問喪의 기회를 자주 가졌다. 문상을 거듭하는 가운데 삶의 덧없음을 새삼 느껴온 작금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목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오늘 홀연히 떠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삶과 죽음의 사이가 멀고먼 거리라는 착각 속에 살아온 세월이 가소롭다. 삶과 죽음이 바로 이웃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었던 탓으로, 앞을 다투며 짧은 시간을 길게 보낸 나날이 어리석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존재하는 모든 개체個體들은 하나뿐인 대자연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이며, 이 점에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스피노자의 말이 다시금 진리로서 다가온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한 사람을 독립된 단위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나뭇잎 하나를 독립된 단위로 볼 수 있는 그것 이상의 것이 아니다. 나뭇잎의 ‘나’가 나무의 줄기와 가지, 그리고 뿌리에까지 뻗어갈 이유를 가졌다면, 사람의 ‘나’도 대자연의 끝까지 확대될 이유를 가졌을 것이다.
‘나’의 경계선을 여섯 자(尺) 미만의 공간 속에 국한하고, 그 국한된 부분을 마치 하나의 독립된 실체처럼 생각하는 그릇된 관념은 인생이 경험하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고 스피노자는 가르쳤다. 불행이란 결국 슬픔, 두려움, 노여움 따위의 괴로운 정서들의 함수이며, 괴로운 정서를 빚어내는 첫째 요인은 전체의 진상眞相을 모르고, 부분을 전체로 오인하여 부분의 보존에만 애착하는 어리석은 이기심이라고 그는 가르쳤다.
스피노자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긴 참된 성인聖人이었다. 나는 그의 가르침을 모두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머리로 이해 한 것을 가슴으로 따르지는 더욱 못하는 소인小人에 불과하다. 소인의 머리와 가슴은 따로따로 제멋대로 달아나니, 말은 말일 뿐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일보다도 더욱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사상을 실천에 연결시키는 문제이다. 나이 탓으로 요즈음 특히 늙음과 죽음의 문제가 단순한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무직한 현실의 문제로서 코앞에 어른거린다.
청년시절에 본 영화에 ‘판도라’라는 것이 있었다. 그 남주인공은 자기 부인이 부정不貞을 저질렀다고 오해한 끝에 아내를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은 그 죄인에게 가장 무거운 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처벌의 핵심은 “너는 영원토록 죽지 못할지어다.”였다.
진시황이 그토록 염원했던 불로장생. 그러나 그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가족과 친지는 모두 떠나가고 홀로 남아서 끝도 없이 살아야 하는 인생.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썩지 않는 비닐 제품이 좋은 물건이 아니듯이, 인생도 그저 오래만 사는 것이 좋은 삶은 아니다. 늙을 때는 늙고 죽을 때는 죽는 인생이 순리에 맞는 인생이고 또 좋은 인생이다. 욕심을 부린다고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유한자有限者로 타고난 인생, 하는 데까지 하다가 웃고 떠나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했던가.
글쓴이 / 김태길
·서울대 명예교수
·전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 상임공동대표
작성일2017-01-0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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