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家의 실패 사례와 로스차일드家의 성공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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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찌家의 실패 사례와 로스차일드家의 성공 사례 >
구찌가 설립자 구찌오 구찌(Guccio Gucci)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고향을 떠나 영국 사보이 호텔에서 일을 시작했다.
당시 사보이 호텔은 전 세계의 부호들이 모이는 곳이었는데, 그는 여기에서 부호들의 럭셔리 취향과 문화를 체험했고,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1921년 피렌체로 돌아와 최고급 가죽 제품을 만들어 파는 작은 가게를 냈다.
1925년에는 그의 맏아들 알도가 아버지의 비즈니스에 참여하며 회사를 크게 확장시켰고,
창업자 구찌오는 1953년 백만장자가 돼 세상을 떠났다.
그는 딸 하나와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세 아들에게만 기업의 지분을 3분의 1씩 남기고 딸은 기업의 유산 지분에서 제외시켰다.
창업 초기부터 회사를 위해 일했던 딸은 이에 격분하고 소송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후 세 형제 중 둘째가 일찍 사망하면서 장남 알도와 셋째 루돌프가 각각 지분을 50%씩 갖게 됐다.
창업 초기부터 일찌감치 회사에 참여한 장남 알도에 비해 루돌프는 회사에 기여하는 바가 적었기 때문에
형알도는 회사에 대한 자신의 기여도를 감안할 때 동생의 50% 지분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구찌는 1960년대 후반 홍콩과 일본 도쿄에 매장을 내면서 아시아를 공략하고 1970년대는 그야말로 럭셔리 제국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형제간의 싸움은 격렬해졌다.
형제간에 첫 균열이 생긴 것은 알도가 구찌가 수익의 상당 부분을 자회사인 향수사업으로 옮긴 것을 루돌프가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향수회사의 지분은 알도가 80%, 루돌프가 20%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다툼이 격렬했다.
그러나 더 큰 분쟁의 씨앗은 다른 데 있었다.
3세대 자녀들이 기업에 참여하면서 형제간의 분쟁은 부자간의 분쟁으로 확대됐다.
바로 알도의 아들 파울로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기업에서 항상 독립적이기를 원했고 자신이 큰 역할을 맡지 못한 것에 좌절감을 느껴 아버지, 삼촌과 계속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그는 ‘구찌 플러스(GP)’라는 이름으로 구찌보다 더 저렴한 브랜드를 만들어 아버지와 경쟁하려고 했다.
이 일로 이사회에서는 주먹다짐이 오가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파울로는 가족기업을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1982년 루돌프가 사망하며 그의 지분 50%는 아들 마우리치오가 물려받았는데,
마우리치오는 백부(큰아버지) 알도와 회사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대립하게 된다.
이렇게 삼촌과 조카가 적대적인 와중에 파울로는 아버지 알도에게 보복하기 위해
그의 사촌 마우리치오와 동맹관계를 맺고 1986년 미국에서 아버지의 탈세를 고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의 동맹관계도 오래가지 않았다.
파울로는 또다시 마우리치오를 견제하기 위해 세금포탈 혐의로 세무당국에 고발했고
이로 인해 마우리치오는 수백만 달러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1987년경 구찌가의 미해결 소송은 18개에 이르렀다.
개인 재정에 엄청난 압박에 직면한 마우리치오는 가문의 다른 계보를 확실하게 축출하고 기업을 재설립하기 위한 발판으로
사촌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 매수를 위한 재정 파트너를 찾았다.
이때 알도는 자신의 아들인 파울로를 축출하는 조건으로 지분을 매도했고,
이로써 마우리치오는 파트너인 인베스트코의 지원으로 구찌 후손들에게 흩어져 있던 50%의 지분 전체를 인수했다.
나머지 50% 지분과 경영권은 마우리치오가 계속 유지하도록 했지만,
결국 1993년 마우리치오는 재정적인 문제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신이 보유한 모든 지분을 인베스트코에 매각하고 말았다.
이로써 구찌가의 역사는 끝이 났다.
그런데 구찌가의 이야기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마우리치오의 죽음이다.
마우리치오의 이혼한 전 부인은 암으로 의심되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마우리치오의 적대 행위에 깊은 상처를 받은 데다
남편이 주식을 매각하는 바람에 자식들에게 남겨질 유산이 사라진 사실을 알고 화가 났다.
그녀는 제멋대로 생활하는 전 남편을 파멸시키고자 결심하고 그의 존재를 사라지게 할 청부업자를 찾았다.
그리고 1995년 3월 살인청부업자는 사무실로 가던 마우리치오를 총으로 살해했다.
그녀는 29년 형을 받고 감옥으로 보내지며 구찌가의 이야기는 끝을 맺게 되었고,
구찌가는 가족 간의 분쟁으로 인해 결국 승계에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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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 가문은 조상 대대로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 게토에서 고물상을 하면서, 붉은 방패(독일어로 로트실트)를 집 앞에 내 걸었다.
그것이 영어식 발음 '로스차일드'의 어원이며, 마이어가 훗날 이것을 성으로 사용한다.
마이어는 12세 때 부모가 사망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대인이 경영하던 오펜하임 은행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300년의 번영을 자랑하는 로스차일드 집안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탈무드'와 '은행'은 자못 유대인다운 배합이었다.
마이어는 유대 신학교에서 탈무드를 공부하여 중동과 유럽의 역사와 어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그러던 중 고대의 화폐에 흥미를 느껴 수집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의 금융왕국을 건설하는 첫걸음이었다.
마이어는 고대 화폐의 유래를 설명한 안내서를 만들어 고객이 될 만한 지배층 사람들에게 우송했다.
그리고 흥미가 없는 사람한테는 고대 화폐를 공짜나 다름없이 사들여서,
부유한 귀족들에게 팔러 다니다가 헤센 카셀의 제후인 빌헬름 공과 직접 거래하게 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한낱 상인에 지나지 않은 유대인 청년이
영주와 귀족을 직접 만나 거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빌헬름 공은 군대를 양성하여 영국 등에 용병으로 빌려주는 장사를 하여 수많은 왕족들이 빚에 허덕이는 가운데서도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화폐수집상뿐만 아니라 환전상도 겸했던 마이어는 빌헬름 공의 재정담당에게 줄을 넣기 위해 애쓴 끝에,
런던에서 보내오는 환어음을 현금화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재정에까지 관여하게 된 것이다.
더욱 운이 좋았던 것은 1785년 빌헬름 공이 아버지 헤센-카셀의 제후 프리드리히 2세의 뒤를 이어 빌헬름 1세로 즉위하여
그의 자산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이때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섬유의 대량생산이 시작되었고, 프랑스혁명으로 독일에서도 면제품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다.
이에 주목한 로스차일드는 빌헬름 1세가 영국에서 용병대금으로 받은 수표를 단순히 현금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표를 바로 영국에서 구입한 면제품의 지불에 충당했다.
또한 다시 주식� �채권에도 투자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기 시작했다.
유럽 최대의 갑부인 빌헬름 1세의 제1금고지기가 된 마이어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가문을 위한 일로서 국경을 초월한 통신과 마차 수송 금융네트워크를 구상했다.
훗날 파리의 5남(제임스, 나중에 3세가 됨)과, 빈의 차남이 협력하여,
유럽전체를 커버하는 통신과 마차 수송 네트워크를 만들었으며 이 네트워크를 이용한 빠른 정보는 엄청난 이득으로 연결되었다.
당시의 수송 네트워크는 오늘날 인터넷에 의한 네트워크만큼이나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남보다 한발 빠른 정보를 이용하여 런던의 네이선은 금과 통화의 투기로 대박을 터트렸다.
이것은 형제들끼리만이 가능한 제휴 플레이였다.
1810년 런던 증권거래소의 지배자 베어링이 죽자 네이선이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 세계 제일의 금융왕 이 되었다.
마이어에게는 암셸, 살로몬, 네이선, 카를, 제이콥(나중에 개명하여 제임스) 등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이 다섯 아들들을 엄격한 유대 교육하에 상인으로 단련시켜,
장남 암셸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본가의 후계자로,
차남 살로몬은 오스트리아 빈,
삼! 남 네이선은 영국 런던, 사남 카를은 이탈리아 나폴리, 오남 제이콥은 프랑스 파리로 보냈다.
로스차일드는 유럽 주요도시에 포진한 다섯 아들들의 견고한 협력체제하에서 19세기 유럽 최강의 금융기관으로 성장해갔다.
마이어의 셋째 아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영국으로 건너가
솜털, 실, 담배, 설탕 등의 상품 거래에 손을 대어 잠깐 동안에 큰 부를 쌓았다.
이 전설적인 사나이는 겨우 몇 시간의 주식 매매로 그때 돈으로 수백만 파운드라는 천문학적 벌이를 했다.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업을 기본으로
석유, 다이아몬드, 금, 우라늄, 레저산업, 백화점 등의 분야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런던의 로스차일드은행은 잉글랜드은행의 대리점으로서 국제 금가격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프랑스의 최고급 포도주 가운데 하나인 보르도의 샤토 무통, 샤토 라피트 등을 생산하는 포도원도 이 가문의 소유이다.
1940년 당시 로스차일드 일족은 약 5천억 달러(당시 미국 전 자산의 2배, 전세계 부의 50%를 지배)를 보유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자산에 접근자체가 불가능하다.
재산을 비밀관리하는 것은 암셸의 유언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불필요한 공격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들 재산은 쉽게 주인을 알 수 없는 펀드나 채권 등의 형태로 운용된다고 한다.
지금 전 세계 국가들은 부채에 시달리고 있고 그 빚의 주인이 미국이라고 주장하는 데,
정작 미국 역시 수조 달러의 부채를 떠안고 있다. 미국의 세금 모두를 몇 년간 모아도 빚을 못 갚는다는 것이다.
세계가 안고 있는 부채의 주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꼭대기에는 로스차일드, 록펠러 등 유대 가문이 있다.
세계는 미국이 미국은 유태인이, 유태인 뒤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다.
로스차일드는 오늘날에도 유럽과 미국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 세계에서,
전쟁과 혁명, 경제공황, 내란을 이용하여 부를 팽창시키고 있다.
작성일2018-05-0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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