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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계원필경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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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4일 (수)
한국고전번역원-서울신문 공동기획

 

고전의 향연 - 옛 선비들의 블로그
⑪최치원 ‘계원필경집

“오직 세상의 사람들만이 모두 너를 죽여 시체를 늘어놓으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도 이미 암암리에 너를 처단할 논의를 마쳤느니라.”(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

 


▲최치원의 초상.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수록.

 

이 살벌한 표현은 최치원(崔致遠·857∼?)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한 ‘격황소서(檄黃巢書)’의 한 구절이다. 흔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불린다. 그 논조가 얼마나 준엄했는지 황소(黃巢)는 격문을 읽다 이 구절에 이르자 간담이 서늘해져서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글이 실린 출전이 바로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다.

 

중국 당나라 말에 황소라는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최치원은 토벌대장인 고변의 휘하에서 비서 역할을 하는 종사관이었다. 계원필경은 이 기간에 최치원이 지은 수많은 글을 엄선해 편찬한 문집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

계원필경은 우리나라 천여 년 문학사에서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다. 그런 까닭에 최치원은 흔히 한문학의 비조(鼻祖)로 불린다. 이에 대해 홍만종(洪萬宗)은 “최치원은 문체를 크게 구비하여 우리나라 문학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했다. 신위(申緯)는 “공이 높은 시조로서 처음으로 개창하였다”라고 말했다. 계원필경의 서문을 쓴 홍석주(洪奭周)나 서유구(徐有榘) 등도 비슷한 평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문학에 대한 평가가 찬양 일변도인 것은 아니다. 이규보(李奎報)는 “최치원은 미개지를 개척한 큰 공이 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종주로 여긴다”라고 하고 격황소서에 대해서도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하는 솜씨”라고 극찬하면서도, “그러나 그의 시가 대단히 높지는 않으니 아마도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 이후에 해당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성현(成俔)도 “지금 그가 지은 것을 보자면 비록 시구에 능하기는 해도 뜻이 정밀하지 못하며, 비록 사륙문에 재주가 있으나 말이 정제되지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 서거정(徐居正), 허균(許筠) 등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바 있다.

 

계원필경 산문은 대부분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위주로 돼 있다. 최치원이 모시던 상사인 고변의 이름자 ‘변(騈)’과 ‘변려문(騈儷文)’의 변(騈)‘이 일치하는 것은 기연(奇緣)이다.

 

사륙변려문은 글자 수를 4·6자, 4·6자로 배열하거나 아니면 4·4자, 6·6자로 배열하는 등 대구를 철저하게 지키는 정형성이 특징이다. 변려문은 전체를 대구로 구성하는 데다 특히 어려운 고사를 많이 사용해 글이 매우 까다로운 특징이 있다. 그만큼 번역하기가 어려우며 각주도 일반 산문보다 훨씬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서거정 같은 대학자도 계원필경에 대해 “이해되지 못하는 곳이 많다”면서 “괴상하고 궁벽하여 족히 천하를 움직이기에 충분하지 않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오히려 그만큼 최치원의 학문 수준이 높았음을 방증한다.

 


▲최치원을 배향하는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무성서원의 전경.

 

최치원이 일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면에는 당시(唐詩)를 시대 구분했을 때 가장 낮게 평가되는 만당(晩唐) 때에 해당한다는 사실과, 후대에 진실성이 모자랐다고 비판받는 변려문에 치우쳤다는 점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러나 후대에도 변려문은 옥책문(玉冊文), 전문(箋文), 반교문(頒敎文) 등 궁중 의례문에 꾸준히 사용됐다. 또 매우 중요한 실용문인 상량문(上樑文)도 반드시 변려문으로 지어져 그 역할이 지속됐다.

 

관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이규보와 성현의 견해를 잘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 그에 관한 평가가 반드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원필경은 최치원의 학문적 역량이나 당시의 시대상 등을 알려 주는 더없이 귀중한 문헌이다.

 


▲‘한국문집총간’ 1집 11권에 실린 영인본 ‘계원필경’의 ‘격황소서’ 구절.

 

#영원한 이방인,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되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가서 7년 만인 18세의 나이에 유학생을 상대로 한 과거인 빈공과에 합격하고 관직 생활에 들어섰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선주(宣州)의 율수 현위(溧水縣尉)가 되어 하급 지방관을 지냈는데, 이때 지은 작품을 모아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이라는 문집을 엮었다. 몇 년 뒤 23세 때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변의 종사관이 돼 약 4년간 군영에서 수많은 문서를 도맡아 저술하였다. 특히 24세 때 서두에 소개한 ‘격황소서’로 온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28세에 귀국을 결심하고 당나라를 떠나 이듬해 3월 신라로 돌아왔는데, 그의 유학 과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유명하다. 
 

“무협의 겹겹 봉우리 나이에 베옷으로 중국에 들어갔다가, 은하계 여러 별자리의 나이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오다.”(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國)

 

무협의 봉우리 12개는 유학 갈 때 나이를 나타내며, 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 28개는 중국을 떠날 때 나이를 나타내는 전고(典故)로 활용한 것이다. 
 

비단옷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출세하여 금의환향했다는 의미이지만, 신라에서의 삶은 기대에 충족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큰 포부를 펴보려고 의욕을 가졌으나 골품제 한계로 좌절을 겪었다. 몰락해 가는 신라 말 정세 탓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여건도 마땅치 않았다. 10여년 동안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전전하다가 40여세 장년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사방을 소요했다. 경주의 남산, 영주의 빙산, 합천 청량사와 해인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의 월영대 등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최치원이 쓴 것으로 알려진 ‘사산비명’ 중 하나인 낭혜화상탑비. 높이 4.55m로 글자 수는 모두 5120자다. 국보 8호.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고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마지막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특히 가야산의 신선이 되었다는 설화가 널리 퍼져 마침내 신화가 되었다. 
 

유학 생활한 당나라에서나 고국인 신라에서나 세상에서 소외된 이방인으로서 그의 내면 정서를 잘 드러내 주는 시가 가장 널리 알려진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秋風唯苦吟 갈바람 속 고심하며 시만 읊나니
世路少知音 이 세상에 진정한 벗 거의 없어라
窓外三更雨 창 밖에는 한밤중에 비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불 앞엔 만 리 먼 곳 그리는 마음

 이 시에서 '만리심(萬里心)'을 신라에서 당나라를 향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렇게 한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역만리 당나라에 있을 때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분명한 근거가 없을 때에는 상식을 따르는 것이 순리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집… 中 회남(淮南)에서 지은 글 모음

 

최치원의 문집으로,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모두 20권 4책으로 편찬됐는데, 1∼16권은 회남 절도사인 고변의 막부에서 종사관으로서 고변을 대신해 지은 글이다. 따라서 글의 주인공은 최치원이 아니고 고변으로 돼 있다. 17권 이후가 자신에 대한 글이다. 대부분 산문이고 시는 17권에 30수, 20권에 27제(題) 30수가 실려 있다.

  국역본 해제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그동안 책 이름 중 ‘계원’의 뜻을 ‘문장가들이 모인 곳’이라거나 ‘한림원’ 등으로 잘못 풀이하고 있기에 이 기회에 분명하게 바로잡는다. 계원은 사전적으로는 몇 가지 뜻이 있으나 계원필경의 ‘계원’은 최치원이 글을 지을 때 머물렀던 회남의 별칭이다. 즉 계원필경집은 ‘계원(회남)에서 문필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지은 글 모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중국 회남시에는 ‘계원촌’(桂苑村)이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또 다른 저술인 중산복궤집의 작명 원리와 똑같다. 여기에서도 ‘중산’은 글을 지은 곳의 지명을 가리킨다. 최치원의 다른 시문집으로 ‘고운선생문집’(孤雲先生文集·고운집)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문선(東文選) 등 여러 문헌에 산재한 작품을 수집해 1926년에 간행한 것이어서 문헌적 가치는 높지 않다.  
글쓴이김영봉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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