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기행 (5) 아르헨티나 -2019년 3월 시카고에서 노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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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에서 3시간 반 걸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다. 아르헨티나는 97%가 백인이다. 소는 인구 1인당 3마리 꼴이고 목장이 어찌 큰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고 한다. 옆에 앉은 젊은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기는 아르헨티나에서 났지만 미국 보스턴에서 자라고 학교를 다니고 간호원을 하다가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와서 산다고 한다. 지금 수입은 훨씬 적으나 스트레스가 없고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자기 생각에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미국사람들 보다 가난하지만 더 행복하게 산다고 한다. 프라이드가 강하고 영어를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명품가개가 인기가 없고 루이비똥이 파산하고 물러난 유일한 나라라고 한다. 오월광장 (Plaza de Mayo) 의 아르헨티나 혁명 기념탑.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불란서 파리를 본따서 만든 도시라 아름답다. 분홍색 대통령궁 (Casa Rosada). 역광이어서 사진이 잘 않나왔다. Museum of Culture. 옛날 스페인 식민지 시절 정부 청사였다. 대성당. 대성당 안에 있는 Jose de San Martin 장군의 묘. San Martin 은 1813 년 San Lorenzo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쳐 아르헨티나의 독립을 이루어 냈다. 그는 이어서 칠레와 페루의 독립도 이루어 이지역의 영웅이 되었다. 관 주위에는 같이 싸운 장군들의 동상이 서 있다. 천정에 열린 구멍이 있는것이 특이하다. 국회 의사당 광장 (Congressional Plaza).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 원본이 있다. 이 조각 원본 3개 중의 하나라고 한다. La Recoleta Cemetary. 유명인사들의 사설 가족묘. 대통령, 장군등의 무덤이 있다. Eva Peron 묘지. 접근을 금지 시킨다. Eva Peron 은 Juan Duarte 라는 부유한 농장주 의 정부인 Juana Ibarguran 사이에 5남매중 4째로 태어 났다. 그녀는 호적에도 오르지 못하고 Eva 가 한살때 Duarte 는 그녀의 가족을 버렸다. 어린시절 Eva는 빈민굴에서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겨우 연명했다. 배우의 꿈을 안고 15세에 가출하여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왔으나 생계가 막막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미모의 육체뿐. 도움이 될만한 남자면 이남자 저남자와 자고 차버리며 오직 출세의 가도로만 내달았다. 그렇게 하여 결국 일류배우가 되었다. 1944년 대지진 이재민 구호모금파티에 인기 배우로 초청되어서 당시 노동부 장관이던 Juan Peron 을 만났다. 마침 첫 부인을 상처했던 Peron과 급속도로 가까와져 동거를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몰린 Peron 이 구금되자 Eva는 압장서서 Peron의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빈민 출신인 그녀의 선동적인 웅변은 노동자 서민들의 가슴을 사로 잡았으며 드디어 Peron 은 이들의 환호속에 석방이 되어나온다. 그는 Eva의 도움에 감격하여 정식 결혼을 하고 이어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하여 Eva는 1946-1952 이나라의 First Lady 였다. Eva는 남편을 도와 노동자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노조를 결성하였다.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고, 대규모 복지정책을 펴서 의료,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 했다. (지금도 의료비는 무료고, 심지어는 여행자가 병이나서 병원에 가도 무료로 치료해 준다. 교육은 초등학교에서 부터 대학까지 모두 무료이다.) Eva는 서민의 영웅이 되었고 애칭으로 Evita 라고 불렸다. 그러다 33세 때 자궁암으로 죽었다. 서민들의 설음은 말할수 없었고 장례식을 한달간이나 하였으며 그녀의 시신은 방부처리하여 영구보존 되었다. 그러나 이런 Populism 은 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결국 국가 경제를 파탄의 지경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그녀와 남편 페론을 우상화 하려고 하기 까지 하였다. 집권층의 부정부패가 늘어나고 서민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진것이 없었다. 군부 쿠데타가 나서 Peron 이 쫓겨나고 그녀의 시신은 자취를 감추었는데 군부는 그녀의 시신을 몰래 이태리 밀란의 어느 묘지에 묻어 놨다. Peron이 재 집권하여 유해를 아르헨티나로 다시 가져왔는데 너무 훼손이 많이 되어 화장을 하여 이 La Recoleta 에 묻었다. 현 정권은 그녀의 신화가 다시 살아날가바 관을 이중으로 안전 장치를 하고 감시를 하고 있다고 한다. Eva 는 노동자 서민의 영웅이었고 그들에게는 성녀 였다. 그러나 한편 포퓰리슴을 정권유지의 도구로 이용해서 국가 경제를 파탄의 지경으로 몰아갔고 부정 부패의 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악녀로 받아 들인다. 아르헨티나 국민을 현재도 그녀를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한 여인으로 생각하며 그녀에 대한 ambivalent 한 감정이 있다. El Ateneo 서점. 오페라 극장을 개조하여 큰 책가개를 만들었다. Bridge of the woman. 특이하게 비대칭형이고 남녀가 탱고를 출때 여자의 하이힐 모습이다. 신시가지. 보카지구 입구. La Boca. 입이라는 뜻이다. 배를 타고 항구로 들어오다 보면 항구가 마치 입같이 보인다고 한다. 이곳은 탱고의 발상지이다. 발코니에 아르헨틴 출신 교황의 모습도 보인다. 카페마다 탱고 춤 시범을 보인다. . 관광객과 사진도 찍어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관광객과도 탱고를 춘다. 구멍에 얼굴을 대고 사진도 찍는다. 교황과 메씨는 이 나라의 영웅이다. 각종 탱고 관련 포스터들을 판다. La Boca 는 대항해 시절 오랜 항해로 시달린 선원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에 도착하면 몸을 풀던 곳이다. 아가씨들은 오랜 금욕생활을 하고 이곳에 도착한 선원들을 유혹하여 돈을 버는 홍등가 였다. 탱고춤은 다분히 선정적이고 유혹적인데 알고 보면 그 뒤에는 서글픈 사연들이 있다. 탱고 음악과 춤에는 세가지 테마가 있다. 첫째는 굶어 죽지 않으려고 이곳에 왔지만 두고온 고향과 가족을 애타게 그리는 마음. 둘째는 비록 하루밤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그래도 정이들어 다시 오겠다는 한마디만 믿고 수평선 넘어로 내다 보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음. 셋째는 그러다가 늙고 병들면 찾아주는 사내도 없이 쓸쓸하게 죽어 간다는것. 인생의 처절함을 담고 있다. 저녁에 탱고 디너 쇼에 갔다. 무용수들의 표정이 음탕하거나 난잡하지 않고 진지하게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예술가들 같이 보였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탱고의 음악과 춤사위에 남미의 마지막 밤이 깊어 갔다. 끝. |
작성일2019-04-06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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