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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1 새로운 시작
얼마 전부터 처음 영어를 배울 때에 시작하는 필기체 알파벳을 매일 한 장씩 또박또박 쓰고 있다. 요즘은 모두가 이메일과 전화 문자로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하지만, 영어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하며 답장해야 하는 가까운 이가 생겨 꼭 손 편지를 쓰려고 한다. 새로 만나 가까워진 그녀는, 가끔 이쁜 편지지에 정성스럽고 이쁜 영어 필기체로 칭찬과 감사의 마음을 멋진 포장의 선물과 함께 보내준다. 답장을 준비하면서 처음 연애편지를 쓸 때 마냥 미리 몇 번을 연습하다 결국은 포기하고, 뒤뚱거리는 글씨로 짧은 글의 카드만 보냈다. 그러다 결심했다, 멋진 필기체의 영어를 한번 제대로 써보자고. ABC 대문자와 소문자를 깜깜한 밤에 혼자 몰래 공책에 하나하나 꼭꼭 눌러쓰고 있는 내가 우습다. 그렇지만 새로운 도전과 시작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해 물감의 소재를 바꾸고, 지금까지 해보지 않던 오일 파스텔도 잔뜩 사놓고 또 펜으로 뎃상을 시작하려 아주 많은 소묘용 펜도 준비해 두었다. 하나씩 꺼내어 조심스레 시작해 보며, 전에는 하지 않던 서투르지만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것으로 벌써 두근거린다. 얼마 만에 맛보는 두근거림인지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신난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굳이 꼭 틀과 형식에 매달려 재미없는 것을 하는 것보다, 서투르고 실패하고 또 엉망의 결과가 되어도 속상해할 것 없이 즐거우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좋아하고 신나고 기뻐서 하는 일이라면, 귀찮고 하기 싫고 힘들어도 그냥 작은 것들이 쌓여 나의 삶으로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음이다. 그렇게 살아가며 배우며, 세상의 내게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오고 가는 흐름 따라 마음의 정리도 가볍다. ABC를 다시 쓰고 연습하는 단순한 새로운 시작으로, 오래전으로 되돌아가 괜히 웃으며 설레고 있는 지금의 유치함도 나름 행복하다.
2025-04-01 반 고흐를 만나다
“그림은 내게 구원이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은 더 불행했을 것이다.” (1887년 여름, 반 고흐) 12월의 진눈깨비 오는 날 찾아간 예술의 전당에서의 반 고흐 전시는 들뜬 마음과 기대감을 안고서, 기다란 줄 속에서 오래 기다렸다. 연말과 겨울방학이어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떠밀려 스치듯 지나가야 했지만, 실제 작품 속 강렬한 붓 자국과 셀 수없는 덧칠과 독특한 색감을 만나는 행운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76점의 작품 속, 27살 처음 그림을 시작하여 이어간 수많은 뎃상과 스케치들은, 어두운 얼굴에 가난하고 힘겨운 노동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과 거친 자연 풍경들이었다. 삶과 예술을 함께 지켜가는 오롯한 고통과 아픔을 그리고 진솔하게 사물을 대하는 순수함과 애정은 모든 작품 속에 고스란히 보였다. 37년을 살다 생전에 단 1점의 유화 작품만 팔렸지만, 지독한 가난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넘어선 예술의 의미와 가치는, 불멸의 감동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난 반 고흐의 작품들은, 굳이 무언가를 이해하려 하는 감정의 날 세움도 필요 없고, 높은 지식과 수준 높은 교양으로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뜨거운 여름 한낮 내리쬐는 태양처럼 강렬하고 솔직하며 또 직설적이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처음 만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구원”이라는 글귀는 마치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어떻게 반고흐의 작품과 삶을 - 나의 작품과 삶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싶지만, 내게도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구원이며 희망이다. 누구나가 살아가면서 갖는 인생 총량의 법칙처럼, 자신의 몫은 다 써야 하고 그 양과 무게는 다 같다는 것으로 변명하고 싶다. 예술은 세상의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하여 또 자신이 좋아하고 열망하여 하는 작업이다. 스스로는 그 안에서 구원과 희망을 품고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가는 과정 안에서, 기꺼이 포장하지 않고 허세 부리지 않으며 전심으로 지켜가는 것이라 믿는다. “예술이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가? 본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허무하지도, 생각에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 (반 고흐)
2025-02-28 노을의 새무리
고개 들어 올려다본 하늘에 새들이 노을을 따라 무리 지어 날아간다. 문득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혼자 웃는다. 얼굴이 기다랗고 여드름 자욱이 선명하고 유난히 마르신 아버지를 못생겼다고 놀리면 늘 “나랑 똑 닮은 내 딸은 어떡하지?” 하시며 더 많이 놀리셨다. 몇십 년 전인데도 낙동강 하류 갈대밭 습지로 새들의 사진을 찍으러 다니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옛날에는 시골의 동네에 가끔 언챙이가 있어, 치과의사인 아버지는 친구분들과 함께 며칠을 지리산 깊은 곳으로 가셔서 무료로 수술을 해주곤 하셨다. 머무른 그곳에서 동네 애들 지내는 모습과 산세 깊은 풍경 등 많은 사진을 찍어오시곤 즐거워하셨다. 집 떠나 먼 곳에 다녀오신 나른한 저녁 식사 후에는, 더없이 만족한 얼굴로 커다란 카메라의 렌즈들을 닦으시다 눈으로 멀찍이 보며 집중하시던 모습은, 여전히 내게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이다. 요즘은 많은 이들이 사진에 관심을 두고서 이야기한다. 언뜻 나도 잊고 있던 아버지의 오래된 카메라 생각이 들어 선반 위를 챙겨보면서 옛 생각에 젖어 든다. 작은 어느 순간 하나가 꼬리를 풀면서 실타래처럼 많은 이야기들을 끄집어내, 기억을 글자로 그리고 문장으로 이끌어간다. 모든 것은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그 인연을 따라 나름 달리 살아가며 이야기를 남긴다. 나의 아버지가 내게 당신의 예술적인 재능을 이런 모습으로 전해 주시는 거처럼, 나의 아이에게도 이런 모습을 많이 남길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새들이 해가 지고 있는 노을을 따라 더 멀리 날아가듯, 나의 아버지도 그렇게 많은 것들을 다 남겨 두고서 떠나셨다. 오랜 시간으로 지키며 간직한 모든 것들의 깊이를 더하여, 두 발 땅에 단단하게 딛고서 살다 오라고, 오늘 아버지가 긴히 일러 주신다.
2025-02-01 “하얼빈” 을 읽고서
“하얼빈” 을 읽고서 (김훈 1948~ ) 책을 펼치고 첫 몇 장을 넘기면서 가슴 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온다. 답답하고 미안하고 한없는 애처로움으로 마지막 장을 끝맺었다.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는 핑계하면서, 오래 전의 약하고 가난하고 힘들었던 조상들의 아픔과 정치를 한다는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의 횡포와 무능함을 차라리 모른 척 외면하고 싶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는, 시대를 지나 살아남은 이들의 강한 부끄러움과 죄스러움도 함께 젖어 있다. 영웅이며 앞선 세상을 살았던 안중근 - 한 남자로서 지나온 짧은 인생은 가엽고 안타까우며 슬프다. 32살의 여전히 인생의 시작 길에서 선 하나의 인간으로도 충분히 외로울 나이일 건데, 조국의 독립을 먼저 돌보려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린다. 그 나이 때의 사내는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어르면서 그 아이가 자라는 모습과 옹알이를 들으며, 가끔은 일상이 지겨워 사소한 탈출을 꿈꾸는 그런 평범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꼭 특별히 안중근이여야 했으며, 어떤 선택을 받아 그는 가족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는지 알고 싶다. 작가 김훈은 책 서문에 이렇게 말한다. “영웅 안중근보다 인간적인 그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당당히 마주하여 그것을 넘어가야 하는 역사의 아픔이지만, 나의 조국은 여전히 요란하다. 아무것도 해준 거 없는 나의 조국에게 한없는 미안함으로 그냥 기도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언제나처럼 길바닥에서 작은 등불 하나 들고 헤매더라도, 더 넓고 높게 올라설 것이며 희망의 멋진 날이 곧 다시 돌아 올 거라 굳게 믿는다. 먼저 살아 편편한 길을 만들어 주신 덕분으로 지금을 살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한 그들의 희생과 아픔의 보답만으로도, 나의 조국은 더 환하고 찬란한 빛을 비추일 것이다.
2025-01-01 삶의 시선
나 자신을 믿는다.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고 우스울지 모르지만 나를 믿으려 애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말에 함부로 휘둘리지 않을 거라는 결심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그 땅에서 자라고 배웠지만, 어느 날 사랑이라는 커다란 산등선을 넘어 넓은 미국 땅 한 곳에서 새로운 낯선 삶을 시작한다. 27살의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무모함으로 하나 넘어서 또 다른 하나 달려오는 - 세차고 강한 바람과 더없이 뜨거운 햇빛을 받지만, 그래도 버티고 지키면서 튼튼해진다. 모르면 용감해지는 거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선선하게 받아들이며 다시 높은 언덕을 넘어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면서 인생의 외투를 벗기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아가다, 어느덧 제법 살아간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 지나가는 나그네를 두고서, 친구 사이인 바람과 햇빛은 누가 먼저 그것을 벗길 수 있을지 내기한다. 바람은 힘을 더하여 강하게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려 하지만 차가움에 더욱더 옷깃을 여미게 되고, 햇빛은 더없이 내리비치는 뜨거움으로 외투를 벗게 만들어, 결국은 햇빛이 이기게 된다. 차가움과 뜨거움 두 가지가 번갈아 오며 미처 외투를 챙길 여유도 없이 바람일지 햇빛일지 배워간 적도 있다. 덕분에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강해지고 또 시간의 경험도 쌓이면서, 적당한 중간의 자리에 앉아보는 욕심 부리며 결코 눈치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믿고 버티는 사실 하나만은 단단하게 결박해 두었다. 이젠 뜨거운 햇빛이 영원한 나그네가 입고 있던 인생의 외투를 벗겨 버렸다. 다시금 강한 바람의 고집으로도 더 이상 감추고 포장할 거 없어, 삶의 시선은 편안하고 따뜻하고 진심으로 감싸안아 주는 넓은 여유 쪽으로 나아가려 한다.
2024-12-02 늦지 않기를
올겨울에도 서울에 가려고 비행기표 날짜를 챙겨본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이 자주 가고 싶다는 마음을 더 이상 감추지 않는다.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곳으로 많은 관광객 중의 하나 되어 공항 검색대를 거쳐 오랜 비행시간 후에 만나는, 새로운 불편함과 낯섦을 견디는 참을성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서 그냥 편하고 정겨운 곳에서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것이 제일이라는 마음뿐이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내가 태어나 학교에 다니며 철모르고 살았던 곳으로 자주 갈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커다란 가방을 풀어놓을 곳이 없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에는 혼자 지내시는 집의 방 하나에 커다란 가방 몇 개 던져 놓은 채 신나게 돌아다녔는데, 다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살아가면서 의지하는 튼튼한 기둥이 사라진 것이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을 진즉에 알아야 했는데, 어리석게도 언제든지 마음대로 오고 싶으면 오고 다시 가고 싶으면 가면 된다고 여겼다. 2년 전 늦은 가을 11월에 불현듯 서둘러 떠나 혼자 몇 주를 머문 서울의 호텔에서 내려다본, 강남대로 위로 쏟아지는 장대 빗줄기 속의 수많은 자동차 불빛에 희미한 엄마의 모습이 창문에 보였다. 나이 들어가는 나의 모습이 엄마이다. 기다란 얼굴과 넓은 이마와 가끔 해가 지는 어둑한 시간이면 맥주 캔 하나 들고서 노을빛에 흔들려 서성거리는 거까지 똑 닮았다. 아니 내가 어느덧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마음도 몸도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란다. 하고 싶고 그리울 때, 비록 낯설고 좁은 호텔 방에 커다란 가방 풀쳐 놓고서라도, 한가득 등 뒤로 남겨두고 온 아쉬운 젊음을 가볍게 정리하고 싶다.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연어의 꿈은 미련 없이 버리고, 후련한 마음으로 맛있는 거 먹고 즐기며 쉬어가는, 서울에서의 눈 오는 겨울날을 기다린다.
2024-11-03 돌보는 마음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그사이 두 개의 계절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4월의 화사한 봄날 오후 병원에서 돌아와 몇 달을 가족과 친지들의 보살핌과 사랑 덕분으로, 지금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짧지 않은 날들이었지만 진정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알았고, 더 많이 밝고 환하게 살아야 한다고 결심한다. 수술 후 한동안은 혼자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힘들어 거실 문을 열고 좋아하는 바깥으로 나가질 못하였는데, 강아지 덕분에 용기 내 살금살금 나왔다. 그런데 모든 나무와 벽들이 엉망으로 달라져 있었다. 담벼락에 달린 작은 등에는 기다란 거미줄들이 한참을 엉켜져 있었고, 등나무는 그사이 또 다른 보라색 꽃을 피우다 제멋대로 넝쿨을 뻗어 귀함을 잃었고, 키 작은 검은 대나무 숲은 뒤죽박죽 여기저기 새순을 내리고 있었다. 슬프다 아니 미안하다. 작은 거 하나도 누군가가 돌보지 않으면 금방 거미줄과 잡초들이 자라듯, 사는 것도 서로가 마음으로 가꾸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가는 사람으로 되겠구나 싶다. 만나는 모두가 다 인연이지는 않을 것이지만 진심으로 스쳐 보내고픈 마음이다. 오늘도 살아가면서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가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도 제대로 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염원을 하고 있는데, 여전히 되돌아 와 제자리에서 종종거린다.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며 또 알고 싶다. “나 아닌 세상의 모든 너”라는 것에 돌보는 마음을 쏟고 사는 사람이 될 희망을 품어본다.
2024-09-01 강한 여자가 좋다.
나 스스로 힘들고 어렵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여자이면서 강한 사람이 되려는 열망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서 살고 있다. 늘 그런 사람이 되려면 경제적인 독립과 튼튼한 육체와 세상에서 꼭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노력하고 있다. 3년 반 전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의 취임식 날 하얀 정장의 당당하며 강한 그러나 여자임을 잊지 않고 있는 모습에 가슴 두근거리며 설레였다. 2024년 9월, 오늘의 그녀는 더 강하고 더 멋지고 더 큰 자신만의 세계를 품고서 미국의 첫 번째 여자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 그때의 그녀는 자신이 부통령직을 수행하는 첫 여성이지만 결코 마지막은 아니라며 새로운 희망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가 만든 또 다른 도전으로 아무도 넘어가 보지 못한 일을 하려고 한다. 너무 강하면 더 강한 것에 부딪히며 부러지기 쉽고 너무 여리면 남들에게 휘둘려 자신만의 길을 찾아 먼 길을 가는 마음을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총명하며 매우 운이 좋으며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우며 절대 여자로서의 약함으로 이를 이용하려 하지도 않는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천천히 서두르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노력과 희생 그리고 긴 시간을 멀리 내다보며 달려온 모습은, 다시금 강한 여자이고 싶은 열망을 일깨우며 가슴 두근거리게 만든다.
2024-08-01 허물을 벗는다
겸손해지는 중이다. 육체의 심한 고통으로 다른 어떤 생각 없이 단 하나 아픔이라는 본능에만 집착하면서 나 자신을 다시 배워가고 있다. 대학 1학년 겨울 스케이트를 타다 심하게 넘어진 왼쪽 무릎이 긴 세월을 따라 조금씩 망가지더니 더는 버틸 방법이 없어, 결국 가장 밑바닥 뼈를 잘라내고 대신 쇠를 삽입하게 되었다. 글로 표현된 뼈를 깎는 고통을 과감히 알게 되었고, 모든 것들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원초적인 전혀 다듬거나 포장하거나 숨기지 않는 인간성을 여과 없이 토해낸다. 지독한 진통제로 버티면서 먹고 이야기하며 잠이 들지만 약기운이 사라지면 심한 아픔에 소리 지르고 짜증을 내며 본능만 보여준다. 결국 나는 참을성 없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이며 몹시 못난 사람이다. 진심으로 깨달았다, 늘 하는 - 밥을 먹고 걸어 다니며 샤워하고 잠을 자는 - 일들이 엄청난 축복이었으며 감사였다는 것을. 그렇지만 이제 그만하고 싶다. 육체의 아픔에 이기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또 늘 하는 그대로의 예전으로 간절히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지금 이 통증도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며 다시 건강해져서 씩씩하게 더 열심히 잘 살 거라 믿고 있다, 비록 지쳐있지만. 나비가 애벌레의 허물을 벗고 화려한 나비로 변하는 꿈을 품고 기다리듯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더 멀리 훨훨 높게 날아갈 날을 간절히 기다리며 환한 꿈을 꾼다
2024-07-01 오래된 많은 것들
오랜 세월의 수없는 시간과 사연들을 지켜보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많은 것들을 사랑한다.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두려운 것은 시간으로 버티며 지켜주는 거라 믿으며 그것으로 또 용기를 낸다. 작은 나만의 공간에는 세어본 적은 없지만 골동품이라는 이름으로 예전의 주인이 누구이며 얼마나 많은 주인들을 스쳐 지나 지금의 나에게로 왔는지 모르는 물건들이 많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무심코 만져본 목단 항아리는 차갑고 냉정하지만, 왠지 모르는 세월의 겸손함이 전해진다. 유난스러운 수집가였던 엄마가 결혼 선물로 용달차 한가득 실어 보내준, 아주 오래된 도자기들과 가구들이 나와 함께 조금씩 다양하게 숫자를 늘려가며 더 나이를 먹고 있다. 비록 겹겹이 쌓인 시간이라는 끈적함으로 덮여 있어도 결코 무겁지 않은 가라앉음으로 자신만의 존재를 나타낸다. 물론 나도 오래되어 고장이 잦아졌고 또 몇십 년 함께한 그 사람도 세월의 흔적을 뒤적거리며 뽀얀 먼지를 날린다. 가끔 굳이 꼭 무언가를 남겨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어떻게 자리를 지키면서 살다, 어떤 오래된 것으로 기억되고 남겨지길 원하는 것일까.
2024-06-02 낮과 밤
낮은 산다는 것이고 밤은 쉰다는 것이다. 낮이 충실하지 않음 밤의 자유도 갖지 못한다. 낮의 삶에 부딪히며 만나는 단어 하나 붙들어, 어두워진 밤이 되면 일상을 내려놓고 낮 동안에 만난 감정의 꼬리를 기억하여 상상의 자유를 누린다. 그런 순간은 무엇보다 착해지며 순수해지려 한다. 점점 무뎌지는 뾰족한 예민함을 다시 일으켜 잡고 싶은 것이다. 그러다 과거의 한순간에 내려지면 그때의 나를 만나고 스스로를 낯선 다른 사람처럼 바라본다. 아픔이 아닌 반가움과 괜한 설움으로 설핏 돌아서지만 그래도 되돌아와 마주친 오래된 만남이 좋다. 긴 시간으로 용기 내며 꿋꿋이 지켜온 세월을 마주하니, 나름 잘 살았구나 하며 지금의 밤으로 돌아와 작은 글 하나 시작한다. 오래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감출 수 있는 까만 밤보다 햇빛 아래 환한 낮의 자신이 더 두렵다. 기꺼이 작은 일상들에 충실하며 진실해야만 밤의 편안한 자유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2024-05-01 변명같은 이야기
어느 한순간 삶은 예정에 없는 준비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간다. 꿈꾸고 기다리지 않았어도 처음 가보는 낯선 골목에 우두커니 서있을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보다 강하고 어느 방향이듯 새로운 길을 찾으며 또 다른 삶을 이어간다. 간혹 꿈을 꾸면 엄마 아버지와 남동생들과 살았던 집에 여전히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내가 보인다. 작은 연못에 진한 주홍빛 잉어 몇 마리들이 헤엄치고 오래된 석상들은 그 주위를 감싸고 있으며 뒤편의 모과나무 몇 그루가 봄이 오면 옅은 분홍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풍경이다. 이젠 봄바람이 살랑대는 동네를 나선다. 아름답던 자주색의 목련꽃이 시간이 지나 작은 바람에 떨어지며 지저분해지는 모습이 싫다. 늘 아름답기만 바랄 수 없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또 쌓여간다. 그러면서 나의 작품들도 흘러가고 쌓여간다. 위대하고 세기에 남는 작품을 남기려고 나선 길이 아니다. 내놓지 않으면 또 꺼내어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가슴 속 많은 이야기들을 말 즉 언어가 아닌 다른 표현의 모습으로 실타래처럼 풀어내는 것이다. 꿈속의 옛집과 그때가 그리워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리고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에게 미안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지나가 버린 그리움과 후회와 미련으로 한곳에서 맴돌며 지치는 거 보다 훨씬 더 살기 편하기 때문이다. 나쁜 일이 꼭 나쁜 것만 아니라 더 좋은 일이 생기게 되는 징조라고 믿는 자신감은, 오래 살아가면서 배운 삶의 지혜이고 또 다른 변명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4-04-02 바람이 분다
세찬 바람과 비가 내리던 밤을 뒤척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마당의 담벼락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늘 보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이상한 풍경에 놀라움으로 당황하다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왠지 모르지만 야릇하게 벌거벗겨진 느낌으로 부끄럽다. 희한한 웃음소리에 벌써 나와 있는 얼굴도 모르는 뒷집 남자가 나를 보자 멋쩍고 민망한 얼굴로 슬그머니 눈을 맞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뒷집의 마당 풍경과 그 남자는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10년을 넘게 담 하나를 두고 살았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 땅에 누워있는 잔해들 덕분에 경계를 풀고 처음으로 이상한 눈인사를 나누었다. 얼마 전부터 나에게도 바람이 분다.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는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하였는데 갑자기 더욱더 어려워지면서 주저앉는다. 더 잘하려는 욕심이 가득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작품들은 방향을 잃었고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 바람과 비에 쓰러진 나뭇조각들처럼 경계를 잃고서 그대로 누워만 있다. 무언지 모르는 낯섦으로 버겁고 또 용기를 잃는다. 바람은 불어오고 있고 오랜 습관과 사고는 끈질기고, 정작 이대로 쓰러져 버려질까 두렵다. 쓰러지면 다시 세우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며 새로운 것으로 만들면 되겠지만, 제발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지 않았으면 하며 서성인다.
2024-03-03 덕수궁에서 만난 장욱진
짧지 않은 시간 속에 계속하고 있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작업을 정리하려, 4년 만에 다시 서울에서 책을 출간하고 전시회를 가졌다. 머지않은 거리의 호텔에서 돌담길을 따라 걸어온 덕수궁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차가운 겨울의 한낮이었고, 큰길을 지나 높은 계단의 미술관에는 장욱진 화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작은 그림들과 소박한 소재들과 마음으로 읽히는 맑은 내면세계의 작품들 앞에 한참을 서있으면서, 갑자기 무언가에 압도되는 감정의 홍수를 만났다. 언젠가부터 스스로에게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또 그것을 찾으려 고민하고 있었지만, 정작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한 채 서성이는 중이었다. 그런데 한참동안 매달리며 고민하고 찾으려 하던 해답이 그곳에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듯 부드러우면서 굳이 많은 외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내면으로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 온전히 전해지는 글을 쓰고 그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간 남자가 한참동안 나를 찾을 때까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되며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오랜만의 각별한 설레임을 안고 작품들 앞에 서있었다. 바로 며칠 전 전시회를 준비한 갤러리 대표와 실제 나의 작품들을 앞에 놓고 나눈 대화가, 글과 그림이 각각의 과정이 아닌 함께 하나로, 굳이 설명하고 변명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어우러지는 시도를 해보면 어떠냐는 또 다른 물음을 던져주었다. 책 출간과 전시회, 덕수궁에서 만난 장욱진 화가의 작품들과 갤러리 대표의 또 다른 물음. 이 모든 것이 가려운 겨드랑이의 날개를 만들어 주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음을 알고 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의 날개)
2024-02-04 또 떠난다
여행의 행복은 장소가 아니라 떠난 곳에서의 자유와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가방 속의 옷가지들과 신발들을 챙기며 한껏 들떠있다, 공항에서 벌써 실망하고 후회한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왠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 구석진 곳으로 슬그머니 자리 잡는다. 남들이 말하는 유명한 장소에 찾아가 우르르 사진을 찍고 또 제대로의 맛을 모르는 다른 나라의 음식을 먹으며, 어두운 새벽 일찍 일어나 가방을 챙겨 새로운 장소를 만나러 떠난다. 어느덧 날짜가 지나 되돌아오기 위해 공항으로 내팽개쳐지면 그때서야 깨닫는다, 진정으로 난 이런 여행을 원하지 않았다고. 태어난 곳을 떠나 영원한 여행객으로 넓은 미국 땅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은 서두르고 또 떠나야 하는 낯선 여행객처럼 구석진 자리에는 늘 커다란 가방이 우두커니 서 있다. 그러면서 도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야만 하는 이방인의 깊은 뿌리 내리려 수고하며 애쓴다. 맛 모르는 갈증에 여유를 부리며 한글로 쓰여진 소설을 읽고 시를 되씹으면서 서울의 어느 곳에서 오래전부터 살았든 모습으로, 서두르지 않으면서 천천히 식은 커피를 다 마신다. 창밖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여전히 덕수궁의 5월 목단꽃을 기억한다. 붉음보다 더 진한 자줏빛의 커다란 꽃잎들이 한가득 피어있는 화원에서 그림을 그리다 돌아 나온 덕수궁 문 앞에서, 초여름의 하얀색 테니스 셔츠를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든 남자를 똑똑히 기억한다.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때 부끄러워 미처 하지 못한 웃음을 환하게 보여주고 싶다. 다시 또 떠난다. 붉은 자줏빛 목단꽃과 하얀 테니스 셔츠를 잊어버리지 않은 채 소복한 눈 내리는 겨울의 덕수궁을 찾고 싶어, 그때의 남자와 둘이 떠난다. 뒤돌아 다시 온 세월을 바라보는 눈이 충분히 달라져 있겠지만, 이번 여행은 추억과 사랑으로 더 행복해지고 더 자유로워지고 더욱더 공감하러 떠나는 길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4-01-01 유행가
막연한 지겨움으로 떠났던 다른 나라의 여행길에서 우연히 듣게 되는 유행가는 뭉클한 애국심과 오랜 첫사랑을 우연히 마주친 그런 설렘이 들어있다. 누군가가 죽기 전에 꼭 봐야 한다는 페루의 마추픽추를 여행하는 도중, 여행사에서 그냥 덤으로 끼어놓은 이름 모를 낡고 오래되고 빈한 바닷가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잘 익은 김치와 라면이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멍하니 바라본 가난한 풍경속의 한낮이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정확한 한국말로 김범수의 “하루”라는 노래가 들려왔다. 어느 여행 중인 한국인일 거라는 생각으로 반가움과 무심함으로 듣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고 구성진 아름다운 목소리로 넓은 바닷가 구석진 자리에서 반주도 없이 페루 남자 하나 고스란히 서서 부르고 있었다. 일부러 찾아본 그는 남자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앳된 소년이었다. 자신을 찾아온 나를 바라본 소년은 스스럼없이 더 크게 노래하며 손바닥을 내밀고서는 돈을 요구했다.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을 알아챈 소년은 자신을 한국인이라 자랑스럽게 말하며, 할아버지가 한국인인 3세이며 지독한 가난으로 16세 나이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고 슬픈 눈으로 나를 부추기며 가방 속 지갑을 열기 바랬다. 작지 않은 돈을 집어주며 어떻게 노래를 부르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우연히 듣게 되었고 핏속에 흐르는 알수 없는 본능과 수없는 반복으로 배웠다며, 수상한 윙크 한번 날리고서는 또 다른 한국 관광객을 찾아 떠났다. 그날 이후 내가 생각하고 있는 유행가는 한때 큰 인기를 얻어 많은 사람이 듣고 부르다 흔적 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날개로 오히려 세상 구석구석 휘저으며 날아다니고 있을 거라는 느낌이다. 세상의 어느 곳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부딪혀 삶의 이야기로 남아 기억 속 어느 자리에 숨어 있을 것이고, 나에게는 어느 날 떠오른 추억 조각들로 또 다른 한편의 글을 이어가고 있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3-12-01 자신과 서로를 잘 돌보세요
"Please take care of yourself and each other." 매일 저녁 뉴스를 그는 이렇게 말하며 마무리한다. 은빛 머리의 나이가 지극한 남자의 마지막 말에 가슴이 울컥해진다. 단지 세상에 생긴 이야기만을 전하는 사람일지라도, 너무 젊고 여전히 세상이 초록빛으로 물든 앵커보다 세상의 파도를 몇 번은 넘어온 사람이 전하는 뉴스를 신뢰하고 찾아본다. 코로나가 한창 온 세상을 망가뜨릴 그때, 어느 동네 병원 속 환자 숫자를 젖은 목소리로 전하며 그는 그렇게 "자신과 서로를 잘 돌보십시오" 하면서 침통한 얼굴로 끝을 맺곤 했다. 그러고 나면 나도 눈물이 핑 돌아 어두워진 막막한 바깥을 바라보며 큰 숨을 쉬었었다. 그렇게 희망의 시간으로 버티며 드디어 깨끗하게 돌아온 세상이 되어 두 팔 벌려 바깥으로 나오려고 하는 지금, 그는 눈동자 속 눈물을 옅게 적시면서 전쟁터 근처에서 어두운 파란색 방탄조끼를 입고서 또 누군가의 죽음과 고통을 전하고 있다. 전쟁터의 화염으로 불탄 무서운 파괴 속에서 비록 화면 속의 현실이지만, 다시 모두가 제발 스스로를 잘 지키면서 살라고 하며 아픔을 전한다. 세상의 커다란 회오리바람 속에 움켜쥐고 붙들며 버틸 힘을, 자신에게 찾으라는 의미일 거다. 일주일에 한 번 겨우 무릎을 꿇고 높은 곳에 계시는 분에게 감사의 예절을 바친다. 지나온 무서운 병으로 갇힌 몇 년의 시간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커다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릎 꿇고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며 이 자리에 있음을 다행스러워한다. 땅에 두발 제대로 딛고서, 현재의 세상이 무엇으로든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마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듯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오늘을 지키며 다시금 찾아올 - 온 세상 평화가 가득하고 찬란하게 빛나고 아름다우며 - 서로에게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해를 간절한 희망으로 기다린다. 세상 사는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진리를 더욱 깨달으며, "자신과 서로를 잘 돌보세요"라는 인사를 모두에게 전하면서, 2023년 한 해 나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친구와 곁의 모든 이들이 예전처럼 살고 있음에 안도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3-11-01 서울 이야기
늘 서울에 서운하다. 나만 그리워하는데 나 없이도 잘살고 있는 서울이 얄밉다. 세상은 나 하나쯤 신경 쓰지 않아도 잘 흘러가는데, 스스로가 남겨두고 떠났으면서 되레 얄미워하고 서운해한다. 마음이 무엇이든, 바보처럼 아직도 못잊어하며 사랑하고 있다는 거다. 서울의 날씨는 뜨거운 여름을 떠나보내기 싫었는지 가을인데도 30도를 넘기고 있다, 문득 축축한 비가 내린다. 습도 높은 가을비 오는 높디높은 아파트들이 하늘을 덮고 있는 압구정 앞길에서, 빨강 신호등에 걸려 쳐다본 길가의 가로수에 이름 모를 열매가 맺혀있다. 차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고서 자세히 챙겨본 먼지투성이의 나무는,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짙은 갈색 동그란 모양의 열매를 한가득 불린 채 서있다. "아니 쟤는 왜 그곳에서 뭐 하려고 서 있는거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으로 웃음이 나왔다. 비록 먼지로 뒤덮은 거뭇한 색상일지라도 더없이 높고 화려한 아파트쯤은 아랑곳없이, 복잡한 압구정 길가에 뚝심 좋게 지키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고 이쁘다. 내가 있는 곳에서 잘 적응하고 열매 맺으며 자신의 몫은 한다는 것이다. 추적이는 가을비가 내리지만 날 만나러 와준 친구들과의 만남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지키며 살고있는, 선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치 어제 만난 거처럼 웃으며 이야기하고 무심한 듯 반긴다. 39살에 혼자되어 세 남매를 멋지게 기른 이쁜 숙이와 늦은 그림 공부의 열정으로 1년을 붙들고서 완성한 300호의 커다란 작품을 보여준 영희와 남편의 사업 실패로 힘든 그러나 열심으로 지키며 살고 있는 제일 사랑하는 그 애와 그리고 세상 무난하고 편한 그러나 날 위해 2시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은 초등학교 친구 - 모두는 진심 고마웠고 사랑이었다. 깜깜해진 밤, 헤어져 돌아오는 길 갑작스레 심하게 내리는 빗속 강남 길가에 막무가내로 멈춰버린 차 안에서, 나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무엇으로 어떻게 지켜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침에 보았던 길가의 나무 열매가 생각났고 방금 헤어진 친구들이 떠올랐다. 무어 그리 서운해하고 그리워하며 얄미워하는지 다 의미 없다. 그만큼 사랑하고 있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 나라 나의 자리에서 열심히 긴 세월을 잘 버티며 적응하고 살다, 어느 날 커다란 가방 챙겨서는 서운함으로 아린 서울을 만나러 오면, 그것 또한 멋진 다른 삶일 거라 오늘 밤 돌아본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3-10-01 낯설음
귀뚜라미는 벌써 울고 있었다. 편안해지려 하고 쉬운 것만 찾다, 계절의 변화에도 세상의 흐름에도 아니 주위 사람 모두에게도 무심했었다. 낯설어해야 한다. 익숙함과 편안함보다는 새로움으로 바라보아야,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어 또 다른 소중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긴 세월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결코 쉽지 않은 결혼생활이 길어질수록, 사랑이라는 이름의 궁금함도 두근거리는 심장과 그리움마저도 잊어버린 채, 이어져 있는 인연 그대로 살아간다. 서울에 살고있는 제일 친한 - 늦게 결혼해 한참을 애기들 기르는 것에 힘들어하는 - 친구가 동네 어린이 놀이터에서 느닷없이 물었다. “넌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 생긴다면 지금의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미처 답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자신은 갖고 있는 것에 다시 두근거림을 만드는 편을 택한다고 하며, 놀고 있는 애들을 눈으로 따라가며 웃고 있었다. 기가 막힌 대답으로 놀란 나는 지금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애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또 놀라게 한다. 시간은 흘러가고 그러다 보니 오늘 밤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실은 하도 오랜만에 올려다본 밤하늘이라 북두칠성이 어느 쪽에 있었나 하면서 잃어버린 하늘을 바라본다. 고개만 들어도 보이는데 참으로 무심했다. 언제나 그러듯 늘 그 자리에 영원히 있을 것이며 내가 아니면 안될 거라는 세월의 자신감과 우월감으로,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생활도 참으로 아주 많이 무심했었다. 헤어지기 싫어 조금이라도 더 곁에 있으려 하였고 작은 말 한마디에 크게 소리 내 웃으며 눈 한번 마주치면 더없이 두근거렸던,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가 보고 싶다. 멋진 낯설음으로 시작하는 사랑의 되돌이 음표를 – 비록 오래되어 낡고 바랜 인생이라는 오선지 위에 선명한 까만 잉크로 그려놓고서는, 깊은 사랑의 아름다운 연주를 시작하려 낡은 악보 펼쳐가며 연습 중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3-09-01 끝맺음
책을 읽다 어느새 끝의 얇은 부피로 남아 있으면, 한꺼번에 다 읽어버리는 것이 왠지 서운해 적당한 자리에서 멈춘다. 어쩔 수 없이 며칠 남지 않은 북클럽 날이 다가오면 멀찍이 두었던 책 페이지를 다시 열어 되돌아 가 읽지만, 억지로라도 끝으로 멀리하려 뒷걸음질 친다. 그러고 보니 몇 개의 유명한 드라마도 세상사는 감동의 이야기라는 시사프로도 마지막 결론에 마주치는 것이 싫어, 끝까지 미처 다 보지 않은 채로 남겨두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그만하자고 이미 결정을 내렸지만 다른 새로움으로 시작하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늘 맨 끝자락에서 어정어정하며 머뭇거린다. 혼자 만들어 놓은 견딜 수 있는 최선의 선을 그어놓고서는 괜찮을 거야 그냥 실수일 거야 하며 핑계를 더 하면서 서성거리지만, 결국 상처받으며 끝맺음을 짓는다. 쌓아놓은 시간 속 감정과 지나가 버리는 흐름이 아까워 아니 게으른 마음으로 미처 다 읽지 않은 책을 찾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진심 후련하고 개운하다. 모든 것을 진즉에 더 빨리 마무리하면 좋았을 텐데 하면서도 버릇처럼 남겨놓는다. 이번 달 책을 읽고 작가가 진심으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아 스스로가 느꼈던 감정을 글로 마무리한 후 책을 덮었고, 또 새로운 책을 기다리고 있다. 끝까지 읽고 나서 한번 나의 손에서 떠나버린 책을 다시 읽는 일은 참으로 드물다. 그렇게 사람과의 관계도 책처럼 멀찌감치 툭 던져버리고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파하고 그 아픔이 진심이었다는 결론을 찾으면 조용히 보내주고 새로이 시작한다. 세상에는 내게 맞는 좋은 사람이 어딘가에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러하기에 살만한 것이며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 가며 새로운 인연을 시작한다. 어쩌면 책을 읽고 난 후의 내가 변화되듯이, 끝맺음의 아픔으로 정리된 세상의 관계도 편안해지면서 또 달라져 있을 것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