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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23 세월 이야기(쉰 둘)
노 대통령이 이곳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고 귀국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평소의 대미관과 다른 언행과 행동을 보며 “납작 엎드렸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거시적인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인식에 따른 변신”으로서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가 귀국하자마자 한총련이란 불법이적단체(?)의 시위 때문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 23주년 기념식장에 “뒷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빠져나오는”참담한 대접을 받았다는 소식입니다. 국회의원이란 높으신 분들(노 대통령과 회담하면서도 앉아서 대통령을 맞이해야 격에 맞을만큼)이 가드레일을 넘어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볼상스러운 사진도 함께 말입니다. 목에 핏대 올리고 목소리 크면 이기는 세상이 새롭게(?) 시작됐음을 알리는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탑건 조종사처럼 항공모함에서 이라크 전쟁의 승리를 선언하는 멋진 쇼를 연출할 때부터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더니만 급기야는 햇볕정책 운운하는 한국을 제외하고 중국, 미국, 북한 셋이서 북핵회담을 벌여 노 대통령의 입지를 상가집 개로 만들어 놓았을 때부터 예견된 일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가 지배합니다. 친노조 정책이 대통령의 이미지와 부합된다고 미리 각 정부부처에서 알아서 기더니 결국 물류대란의 씨앗이 되어 버렸고, 불법이적단체로 규정한 한총련의 수배자들을 아무런 법적근거없이 사면운운하다가 이번에 된통 귀싸대기를 맞은 꼴인데 이 역시 이미 식자들간에는 예견된 불상사입니다. 노조의 목소리가 커지고 각종 이익 단체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면서 쫄아들어가는 것은 힘없는 국민들의 어깨와 힘없는 대통령의 위상인 것 같습니다. 안팎으로 굽실거리고 이눈치 저눈치 봐야 살아갈 수 있는 자리가 서민 대통령 자리인가 싶습니다. 그러다가도 아차 잘못하면 청문회에 나가서 이당 저당 철새처럼 날아다니며 선량자리 유지한 정치 잡초들에게 멱살 잡힐까봐 퇴임 후에는 두문불출 전전긍긍해야 하는 안타까운 자리이기도 합니다. 세상사에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입니다. 한번 원칙을 깨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인과의 법칙입니다. 노사간의 갈등에서 언제부터인가 변칙이 통하는 세대가 됐습니다. 관 둘러메고 사업장을 몇 달씩 금전하게 해도 “무노동 무임금”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있는 자가 손해보는게 낫다는 식의 동정론에 기인한 잣대가 대통령의 손에 들렸으면 언젠가는 애꿎은 국민들만 볼모가 되기 안성맞춤입니다. 굴욕적인 한미정상회담 반대를 외치는 한총련의 천여명 시위대의 “개구멍으로나 드나드는 모습을 보이라”는 식의 정문봉쇄에 15개 중대 이천명의 경찰병력이 속수무책 우왕좌왕이었다는 보도에 아연실색할 지경입니다. 시위대에 대한 진압, 처벌, 대응에 대한 무원칙 때문에 복지부동하고 서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간첩이 횡행해도 어느 틈엔가 주적개념이 없어져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 현 상황이 원칙없는 햇볕정책의 적용 때문이란 특별검사의 수사상황이 조심스럽게 떠오르는 작금입니다. 원칙에 입각한 것이 비록 경직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혼동과 무질서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건강식품들이 온갖 거짓말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떴다 사라졌다 합니다. 일본에서 만들었느니 중국에서 만들었느니 하면서 은근히 사대주의적 권위를 내세워서 장사속을 차리느라고 혈안이 된 요즘 그런 종류의 건강보조식품(선전은 기적의 약품으로 불치병, 난치병 등 못 고치는 게 없다고 함) 한두개 먹지 않는 사람 찾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단순합니다. 밥 잘 먹는데 소식하고 잠 충분히 자고 시간 맞추어 배변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에다 세상살이에 너무 욕심갖지 않고 자족하는 것인데 이 원칙 무시하면 가뜩이나 편향된 건강식품의 기미(기운과 맛)가 어디로 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정치판이고 장돌뱅이판이고 돌팔이 판이고 그들 나름대로의 원칙을 고수해서 애궂은 사람들 피해 입는 경우가 안생기는 세상은 아마도 피안의 세계나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 삼보한방의료원 원장 최은환 한의사 일요시사제공
2003-05-22 산호세 한인회에 대해서
자유 게시판에서 실린 내용입니다. 저에게 이러한 기회를 주신 sfkorean.com에 감사드립니다. 한인회 사무실이 몇년전만해도 엘카미노에서 지역한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한인 권익을 위해서 시민권 서류를 구비하고 오는 동포에게 친절한 안내를 해 주던일이 기억이 납니다. 6년전에 친구와 함께 한인회 컴퓨터가 고장났다고 해서 자비로 하드드라이브를 교체해주기도 하였읍니다. 한인회가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린 산호세 지역을 떠난것 같읍니다. 봉사한다는 마음이 없는 몇몇 사람들의 개인모임이 됬는지 아니면 지역 한인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지… 멀리 타국에와서 이민생활을하는 우리동포를 위하여 봉사하겠다는 순수한마음으로 초기 회장단들이 정성들여 이룩한 산호세 한인회가 이제 점점 우리의 곁을 떠나가고 있읍니다. 많은 지역동포들은 교회의 일이 이민생활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며 동포의 일에는 관심이 전혀없읍니다. 기독교면 어떻고 천주교, 불교면 어떻습니까? 한인들이 미국에서 최고액수의 기부금을 낸다고 하는데 자신의 종교를 제외하고는 인색하기 그지없읍니다. 관심도 없고…. 이종문회장이 큰 금액을 기부하여 한인의 위상을 높힐때도 입만 살아서 뒤에서 떠들던 많은 사람을 보았읍니다. 이종문회장이 전부 잘했다고는 할 수 없읍니다. 하지만 그분만큼 이곳 한인사회를 빛 낸분이 몇이나 됩니까? LA 폭동사건이후 한인사회가 분연히 일어나더니… 냄비가 식었읍니다. 미국이란 사회는 소수민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종별로 단합된단체 및 협회가 있읍니다. 흑인, 유태인, 맥시칸, 중국인, 인도인…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낄땐 이미 늦을 수 도 있읍니다. 지금부터 우리모두 한인회의 정상화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작고 큰일이 있을때 우리와 우리의 2세를 도와줄 수 있도록 지금부터 노력했으면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3-04-27 한인 코메디언 마가렛 조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아시아 계 헐리웃 명사 마가렛 조 마가렛 조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아시아계 코메디언,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개그우먼으로 알려져 있다. 마가레 조는 196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3일만에 노동허가를 취득하지 못한 아버지가 귀국하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마가렛을 키울 능력이 없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있는 한국으로 보냈다. 학교공부에 관심이 없던 마가렛(0.6 GPA)은 Lowell High School에서 퇴학 당한후 Performing Arts 학교인McAteer High School로 전학 했다. 16세에 아버지가 운영하는 책방위에 소재한 Rose & Thistle에서 처음으로 스텐드 업 코메디를 공연한 이후 할리웃의 유명인사가 되는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제작된 1994년의 텔레비젼 코메디 `All American Girl.`은 그녀를 미국의 스타 대열에 올려 놓았으나 각본 및 감독의 연출 부족에 따른 시청율 저하로 방송중단 사태를 맞으면서 마가렛 조는 마약에 빠져들며 방황하기도 했다. 2000년 이후 재기한 마가렛은 I`m the One That I Want 및 Notorious C.H.O.를 성공시키면서 재기에 성공 했다. 아래의 내용은 마가렛 조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DP: 마가렛 조씨의 모든 공연은 늘 신나고 재밌습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특별히 더 좋아하는 공연장소가 있습니까? CHO: 특별히 좋아하는 공연 장소는 없고, 저는 공연하는데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많은 팬들이 제가 공연할 때면, 수시로 찾아옵니다. 이들 팬들은 제게는 제 2의 가족이라 할만큼 소중합니다. 저는 그 분들께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제 공연을 보기 위해 시간과 돈을 들인 만큼 충분한 가치를 제공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 라이브 쇼를 보기위해 사람들은 시간과 돈 등 꽤 많은 것을 투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DP: 지난 번 공연 중에 마가렛 조씨는 부모님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고 또, 마가렛 조씨의 영화 [NOTORIOUS CHO] “악명높은 조”에도 부모님이 출연하셨는데요, 부모님 이야기좀 들려 주시겠어요? CHO: 실은 정말 재밌는 일인데요, 제 부모님은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잘 모르십니다. 그분들은 제가 유명인이라는 사실에 그저 즐거워 하신답니다. 전 올 여름에 결혼할 예정인데요, 제 아버지께서 제 약혼자를 처음 만나셨을때 글쎄, 우리 딸을 좀더 좋은 아내가 되도록 잘 가르치지 않아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개나 고양이처럼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전 웃으면서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고 말하긴 했지만.. 어쨌든 저는 부모님과 매우 가깝게 지냅니다. 전 제 부모님을 그냥 단순한 부모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제 부모님들 앞에서 공연한다고 해서, 행동양식을 바꾸지 않습니다.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들어내고, 누가 보든지 간에 제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표출하는데 자유롭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부모님은 제 농담중 상당부분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시거든요? 그러니까 그점이 바로 절 구해준답니다. DP: 한국을 방문하신지가 얼마나 됩니까? 한국에 가서 혹시 문화적 충격같은 건 없었습니까? CHO: 한국을 방문한지가 약 25년전이었으니까, 아주 오래 전이었습니다. 이상했던 건 사람들이 제가 미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는 겁니다.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요, 다들 금방 알았어요. 한국에서 공연을 가지면 좋겠는데 실은 코메디 공연이란 그 나라 특유의 문화적 특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 예를 들어 영국이나 호주 같은 나라에서 조차 , 유머가 그대로 전달되기가 꽤 어렵거든요. 미국에서 통하는 농담이 캐나다에선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DP: 마가렛 조씨는 미국 연예계에서 몇 안되는 아시아계 연예인 가운데 한 명인데요, 어떻게 해서 연예계에 진출하셨습니까? CHO: 꽤 힘들었습니다. 많은 오디션을 거쳐야 했는데 잘 안됐습니다. 저는 지금 회사를 소유하고 있고, 수입도 올리고 있습니다. 전 제가 원하는 작품을 선택할 수도 있고, 창의력도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저는 배우가 아닙니다. 저는 코메디언입니다. 저는 십대때부터 코메디를 시작했습니다. 전 코메디를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20년쯤 후, 전 제가 한 일에 대해 매우 만족할 것라고 생각해요. DP: 끝으로 마가렛 조씨는 앞으로 어떤 공연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CHO: 전 코메디를 사랑합니다. 전국 순회 공연도 계속 할 것이고, 글도 쓰고, 영화도 두 편 제작할 겁니다. 하나는 이번 순회 공연에 관한 내용이고, 또 하나는 인생 여정에 관한 기록영화입니다. 꽤 흥미로울 겁니다.
2003-04-04 뉴스위크에서 선정된 유망 디자이너 벤자민 조
쿠퍼티노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벤자민 조(사진, 26)가 ‘뉴스위크’지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디자이너 3명중에 하나로 뽑혔다. 지난 1월호 패션면에 게재된 벤자민 조 기사 내용에 따르면 벤자민을 포함한 이들 영 디자이너들은 현재 부와는 떨어져 있지만 이들이 가진 재질은 부의 가치를 넘어섰다고 평가하고 이들이 가진 예술적인 취향과 순수성을 자세히 소개했다. 특히 벤자민 조는 이들 유망 디자이너중 가장 나이가 어리면서도 창의적인 예술과 섬세성이 놀랍다면서 벤자민의 옷 한점이 4,000달러에 팔리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옷들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거기에다 고객도 한정이 되어 있어 재정 면에는 여전히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 ‘뉴스위크지’외에도 벤자민 조의 인터뷰와 작품이 게재된 잡지는 ‘보그’외에도 수많은 패션 잡지에서 볼 수 있다. 미국 ‘보그지’는 서슴없이 그를 테스 기버슨, 소피아 코코살라키와 함께 가장 떠오르는 신인 디자이너로 선정하기도 했고 ‘하퍼스 바자’도 ‘Big Ben’이란 타이틀 아래, 그의 창의력을 찬사하는 수식어들로 가득한 기사를 게재했었다. 피시 테일의 스커트와 재킷, 롱 재킷을 정교하게 잘라내 변형시킨 미니 드레스, 풍성하게 소매를 부풀리고 등을 깊게 판 재킷 등,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시작과 끝을 구분하기 어려운 독특한 테일러링의 수트를 술로 땋아 내린 드레스들은 벤자민 패션의 트레이드 마크. 블랙, 화이트, 퍼플로 한정시킨 컬러 속에서 꾸뛰르적인 테크닉과 로맨티시즘을 보여 주었던 은 그의 의상은 뭉크의 그림처럼 섬뜩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평이다. ‘보그’ 잡지에는 그의 명성과는 달리 그의 작업실은 사뭇 다르다고 표현했다. 10평도 채 되지 않는 크기, 엉성하게 짜여진 큰 나무 작업대와 몇 개의 재봉틀이 전부이며 컬렉션 준비를 위해 잠시 친구의 작업실을 빌려 쓰는 가난한 디자이너이지만 그래서 그의 순수성과 창의성은 더욱 가치가 있다고 이 잡지는 추켜세웠다. 그러나 가탈스런 입맛에 독설을 서슴치 않는 뉴욕 패션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얻고 있는 그이지만 역시 더 절실한 건 작품 콜렉션을 개최하는데 필요한 스폰서의 호의. 벤자민 조는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쿠퍼티노 린부룩 고교를 졸업한 뒤 뉴욕에 있는 유명 디자인 대학인 파슨 스쿨에서 수학했고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아버지는 서울공대와 MIT 출신으로 마운틴 뷰 NASA에 근무하고 있는 조영충 박사, 어머니는 현재 한국에서 오페라 가수이자 경원대학교 교수로 재임하고 있는 김성애씨. 어릴 때 첼로를 공부하기도 했던 그는 어머니가 즐겨보던 ‘보그’지를 통해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의사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망과는 달리 패션 디자인의 길을 선택했던 벤자민은 “어려움은 많았지만 후회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자신대신 누나가 신경과 의사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이 뉴욕 패션계를 비상하고 있는 벤자민 조. 벤자민 조의 전체 컬렉션을 보길 원하면 웹사이트 www.style.com을 클릭하면 된다.